신을 찾아서 - 어느 무신론자의 진리를 향한 여정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7



내가 ‘나를 찾는 길’에서 ‘하느님(신)’을 본다

― 신을 찾아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글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2015.10.16. 14800원



  내 어릴 적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나는 어릴 적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늘 보았습니다. 도깨비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허옇거나 속이 다 비치는 무언가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만한 어른이 둘레에 없었고, 이러한 것을 보는 내 눈이 무엇인가를 밝힐 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아침이고 밤이고 가위에 눌린 몸짓이었습니다.


  귀울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귀울음이라기보다는 어떤 소리가 늘 들리곤 했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적에 이 소리는 한결 크게 들립니다. 이 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아닙니다. 달리기를 해도, 뜀박질을 해도, 수다를 떨어도, 늘 내 귀로 듣는 이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만한 책이나 지식이 곁에 없는 채 어린 나날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쩐 종말을 향해 가는가? (17쪽)


백화점에는 내 관심을 끌 만한 것들이 없었다. 내 옷은 어머니가 손수 지은 것 아니면 통신판매사 시어스의 카탈로그에서 주문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인공적인 환경은, 막 형성되기 시작한 교외의 모습이라 해도, 게나예나 한 가지라 지루할 뿐이었다. 어딜 가나 벽돌 한 장, 지붕 판자 하나까지도 판박이였다. 그러나 자연은 차원이 다르다. 나뭇가지 하나, 구름 한 덩이, 바다의 파도 하나도 같은 게 없어 제각각 눈길을 끈다. (32쪽)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이 쓴 《신을 찾아서》(부키,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도 어릴 적에 ‘무엇인가’를 늘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녁이 본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예배당에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많고, 성경을 가르치려는 학교는 있어도,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에 들리는 소리를 제대로 밝혀 주는 길잡이나 어른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신을 찾아서》를 쓴 분은, 또 이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신(神)’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한국말에는 ‘님’이 있습니다. ‘지기’라든지 ‘지킴이’도 있고, ‘하느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한겨레 발자취를 돌아보면, 이 땅에 서양 종교가 들어오기 앞서부터 ‘하느님’을 늘 말했습니다. 그리고, 해님·달님·별님·꽃님·숲님처럼, 모든 목숨이나 숨결한테 ‘님’을 붙였지요.


  개님이나 고양이님이나 닭님이나 범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목숨붙이가 어떤 넋인가를 헤아리면서 ‘님’이라는 말을 붙여요. 그래서, 풀님이나 나무님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말은 풀과 나무를 고이 아끼는 몸짓이 됩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밥님’이라 말하고, 가문 땅을 적시는 비를 바라보며 ‘비님’이 오신다고 외치지요.



학습 친구들은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허수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남들이 무엇을 목구멍에 쑤셔넣든 그대로 삼키게 될 거라고. (52쪽)


생명의 목적은 죽음일까, 아니면 계속 살아 있는 것일까? (64쪽)


우리는 지상에서 짧은 삶을 살다 죽지만, 대신에 의미라는 영예로운 보상을 받는다는 것. 이때 의미는, 찾으려고만 들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고, 죽음의 순간에 저 높은 하늘에서 북극광처럼 빛나면서 그간의 모든 하찮음과 고통을 상쇄해 준다는 것. (76∼77쪽)



  사람은 살려고 태어납니다. 사람은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려고 태어나기에, 살면서 할 일을 할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사는 동안 죽음만 걱정하다 보면, 정작 스스로 할 일을 놓치거나 멀리하고 말지요. 돈을 버는 까닭이 오로지 돈벌이를 하려는 뜻이라면 죽는 날까지 돈은 실컷 벌 만하리라 느껴요. 돈벌이에만 뜻을 두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오직 돈벌이만 뜻이라면 말이지요.


  학교를 오래 다닌다든지 책을 많이 읽는 일도 이와 같아요. 왜 학교를 오래 다녀야 할까요. 왜 대학교나 대학원을 가야 할까요. 책은 몇 권이나 읽어야 할까요.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얼마나 보아야 할까요. 사랑하는 짝은 몇 사람이나 사귀어야 할까요. 밥은 하루에 몇 그릇을 먹어야 배부르거나 넉넉할까요. 자동차는 얼마나 몰아야 하고, 잠은 얼마쯤 자야 할까요.


  얼핏 보기에 너무 마땅할 수 있지만, 곰곰이 따지면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늘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새롭게 바라볼 때에 비로소 삶이 새롭게 열리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숨을 쉬지 않으면 누구나 죽지만, 숨쉬기를 생각하며 숨을 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숨을 쉴 적마다 ‘아, 난 숨을 쉬지’ 하고 생각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마시는 숨이 얼마나 달콤하거나 고마운가를 문득 생각할 만해요. 맑거나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고 싶다는 꿈을 품을 만해요. 오늘은 매캐한 배기가스가 가득한 도시에서 살지만, 언젠가는 따스하고 시원한 바람이 사랑스러운 숲집에서 살겠노라는 꿈을 품을 수 있어요.



동생들은 일기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앞에만 붙어 있었으므로 내 시야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텔레비전 앞으로 끌려간 동생들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90쪽)


나는 무엇에 반기를 들었던가? 내가 맞선 건 고등학교의 집단주의적 기획이었다. (103쪽)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집단주의가 끔찍하게 괴로웠습니다. 끔찍하게 괴롭다 보니 못마땅했습니다. 군대에 가서도 집단주의가 모질게 고달팠습니다. 모질게 고달프다 보니 싫음을 넘어 미움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집단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군대도 없어질 낌새가 아직 없으며, 회사나 공공기관 얼거리는 군대하고 닮습니다.


  평등을 말하려면 평등은 어디에서 이루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척척 갈리는 얼거리가 있는데 평등을 말할 수 없겠지요. 직책에 따라 시키는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이 갈리는 곳에서 평화를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대통령은 가장 위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라는 소리요, 으뜸 심부름꾼이 대통령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집단주의란 무엇일까요? 집단주의는 집단에 따르라고 하는 주의입니다. 집단에 따르려면 ‘스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스스로 움직이면 ‘집단이 안 되’거든요. 나는 이쪽으로 가고 싶어서 이쪽으로 가면 집단이 깨지지요. 그래서 집단에서는 ‘전체주의’로 흐르기 마련이고, 어떤 지도자 한 사람 뜻에 따라 한꺼번에 움직이는 흐름이 됩니다.


  함께 움직이면서 슬기롭게 힘을 쓸 수도 있어요. 이른바 두레와 품앗이가 있어요. 이때에는 함께 뜻을 세워서 어떤 일을 합니다. 다만, 두레와 품앗이는 어느 일을 할 적에는 함께 움직이되, 여느 때에는 늘 저마다 제 삶을 지어요. 그리고, 두레와 품앗이에서도 저마다 몫이 다릅니다.



아메바에게도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산소 원자는 수소 원자에게 실제로 욕망을 느낀다고 과학이 시인했다면, 나는 아마도 덜 외로웠으리라. (119쪽)


나는 동생에게 솜사탕을 안기고 앉힌 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뭐든지. 자기에게 그럴 힘이 있다는 것만 알면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다고. (178쪽)



  《신을 찾아서》라고 하는 책은 무엇을 말하려 할까요? 이 책은 ‘신’이나 ‘님’이나 ‘하느님’을 말하는 책일까요? 어느 모로 보면 이 책은 신이나 님을 말하지 않으려는 책이면서, 다른 모로 보면 이 책은 신이나 님은 하늘 꼭대기나 땅 깊은 곳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있다는 이야기를 말하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보라’고 이야기하려는 책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속에서 싱그럽게 살아서 춤추고 꿈꾸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삶을 즐겁게 지어서 아름다운 길을 가자고 하는 책이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평생 싸웠던 대상은 가난도, 실패도, 종교도, 지적 퇴행도 아니었다. 그것은 따분함이었다. (239쪽)


나는 과거의 나에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고. 배우는 것 근처에도 못 갔다고. (314쪽)



  요즈음도 나는 맨눈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맨귀로 무엇인가를 듣습니다. 이 모습과 소리가 무엇인가를 똑똑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허깨비를 본다고는 느끼지 않고 헛소리를 듣는다고도 느끼지 않아요. 아마 나는 마음에 있는 눈으로 무엇인가를 볼는지 모르고, 마음에 있는 귀로 무엇인가를 들을는지 몰라요. 그리고, 나뿐 아니라 우리들 누구나 마음에 있는 눈으로 서로 사귀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고 느껴요. 우리들 누구나 마음에 있는 귀로 서로 아끼고 보듬는 꿈을 나눌 수 있다고 느껴요.


  삶으로 사랑을 짓고, 삶으로 꿈을 노래합니다. 삶으로 사랑을 들려주고, 삶으로 꿈을 주고받습니다. 《신을 찾아서》는 바로 이 대목을 느즈막한 나이에 비로소 찾은 발자국을 들려주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암 선고를 받고, 이제 죽음 문턱에 선 나이라고 느끼는 글쓴이가 그동안 수수께끼처럼 가슴에 품었던 실마리를 풀려고 하는 기나긴 삶길을 보여주는 책이로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신을 찾아서”란 “나를 찾아서”입니다. “나를 찾아서”란 “삶을 찾아서”입니다. “삶을 찾아서”란 “꿈을 찾아서”이고, “꿈을 찾아서”란 “사랑을 찾아서”이지 싶어요. 나를 찾으면서 삶을 찾고, 바야흐로 꿈과 사랑을 찾으면서, 오늘 하루도 아침부터 노래하는 웃음꽃을 피우는 이야기가 바로 ‘하느님’ 이야기이지 싶습니다. 4348.11.11.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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