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자전거 삶노래 2015.9.26.
 : 한가위에 시골 자전거


한가위에 시골집에 남습니다. 한가위를 앞두고 아주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살림을 꾸리는 도시를 떠나서 저마다 태어난 시골을 찾아갈 텐데, 나는 아이들하고 시골집에 조용히 남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우리 집도 한가위에 신나게 먼 마실을 나설 테지만, 아이들을 이끌고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야 할 어버이가 오른무릎을 크게 다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버스를 오래 탈 수도 없어서 시골집에 남습니다. 이제 제법 걸을 만하고, 자전거도 가볍게 몇 킬로미터쯤 오갈 수 있으나, 아직 절뚝절뚝 엉성하게 걷습니다. 스물닷새 즈음 앞서 논둑길에서 물이끼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자전거 사고가 나서, 그때부터 끙끙 앓으며 무릎을 다스리며 지냈습니다.

한가위를 이틀 앞두고 마당에 떨어진 가랑잎을 쓸고 치웠습니다. 무릎을 다쳐서 걷지도 못하며 몸져누운 동안에는 마당에 떨어진 가랑잎을 쓸 엄두를 못 냈어요. 좀 걸을 만하다 싶어서 마당에서 비질을 하는데, 한 시간 남짓 비질을 했다고 무릎이 다시 시큰거려서 한참 드러눕습니다.

한가위를 하루 앞두고 베갯잇을 빨고 이불을 마당에 내놓아 해바라기를 시킵니다. 집안 청소도 합니다. 다 낫지 않은 무릎으로 걸레질을 하자니 무릎이 욱씬거리지만 이럭저럭 할 만하기는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집’에 남아서 맞이하는 한가위인 만큼, 한결 깨끗하고 말끔한 집인 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려는 마음입니다. 다만, 두어 시간 동안 집안을 쓸고 닦고 하다 보니 무릎이 매우 시큰거려서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고는 새삼스레 한참 드러눕습니다.

그제 아침 낮으로 마당을 쓸고 풀을 뽑는 동안, 또 어제 아침 낮으로 신나게 집안 청소를 하는 동안, 우리 집 대문 앞으로 지나가는 낯선 어른과 아이 목소리가 꽤 들립니다. 옳거니, 한가위에 시골로 찾아온 손님이로구나. 큰 명절일 때라야 비로소 시골집으로 찾아오는 ‘도시 이웃’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낯선 이름일 ‘도시 이웃’인데, 한가위에 시골로 오는 사람이랑 한가위에 시골에 있는 사람은 서로 삶과 터가 달라요. 나는 언제나 바로 이 시골에서 사는 시골사람이고, 한가위에 고향을 찾아 시골로 오는 이웃은 도시사람입니다.

그제 낮에 대문 앞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귀를 기울이니, 우리 집 대문 앞에 잘 자란 커다란 호박알을 놓고 주고받는 말소리입니다. 아이 어머니인 듯한 목소리가 아이한테 “얘, 건드리지 마.” 합니다. 어제 아침에도 또 커다란 호박알을 놓고 주고받는 말소리가 났는데, 어제 저녁에 아이들하고 가을마실 하려고 자전거를 끌고 대문을 열고 나왔더니, 우리 집 대문 앞 커다란 호박알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맛나게 먹을 분이 즐겁게 따 갔을 테지요.

아이들은 할머니 집에도, 이모 집에도, 큰아버지 집에도 찾아가고 싶습니다. 그래, 할머니와 이모와 큰아버지는 너희하고 얼마나 잘 놀아 주니. 한가위라서 할머니 집이나 이모 집이나 큰아버지 집에 찾아가고 싶은 아이들은 아닙니다. 언제라도 신나게 버스랑 기차를 타고 먼먼 마실길에 오르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나들이를 하고 싶은 아이들을 집에만 둘 수 없는 노릇. 집안 청소를 얼추 마치고 몸져누워서 쉰 몸을 일으킵니다. 아이들한테 주전부리를 챙겨 준 뒤에 자전거를 꺼냅니다. 자, 우리 가을내음을 듬뿍 쐬러 다녀와 볼까?

마을 어귀에는 걸개천이 나풀거립니다. 올해에는 여름에도 가을에도 바람이 거의 안 붑니다. 바람이 거의 안 부는 날씨라서 자전거를 달리기에는 좋지만, 한여름에는 바람이 없어서 무척 힘들었습니다.

바람이 좀 불면 바람 따라 출렁이는 들녘을 더 새롭게 바라볼 만합니다. 바람 따라 이리 출렁이고 저리 출렁이는 샛노란 들녘은 대단히 멋있습니다. 샛노랗게 잘 익은 논은 곧 베기 때문에, 샛노란 가을물결을 볼 수 있는 때는 한가을에 며칠 안 됩니다. 올해에는 한가위 언저리에 아직 모든 논이 샛노랗게 물들지 않았으니, 한가위가 지나고 이레나 열흘쯤 뒤에 바야흐로 아주 멋진 물결이, 이른바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리라 생각합니다.

자전거는 천천히 달립니다. 오른무릎이 많이 나았어도 덜 나았기에 천천히 발판을 구릅니다. 천천히 달리는 동안 아이들한테 곧잘 말을 겁니다. “얘, 저기 하늘을 봐. 오늘은 구름이 어떤 모습일까?” 논둑이나 풀숲에서 들리는 풀벌레 노랫소리를 놓고 큰아이가 묻기도 합니다. “아버지, 무슨 소리야?” “응, 풀벌레 노랫소리야. 이 길을 지나가 주어 반갑다고 하네.” 저물녘 하늘에 커다랗고 길다란 구름 띠가 하나 보입니다. 이 밑으로 자잘한 구름이 매달립니다. “저 구름은 무슨 구름일까?” “비행기?” “비행기일까? 나는 고래 같은데. 커다란 구름은 어미 고래. 그 밑에는 새끼 고래.” “고래가 저렇게 있으니 하늘을 나는 비행기 같아.”

구름이 있는 하늘 밑에서는 구름을 보고, 구름이 없는 하늘 밑에서는 새파란 빛살을 봅니다. 아직 푸른 기운이 짙은 들을 보면서 풀빛을 새롭게 헤아리고, 샛노랗게 잘 익은 들을 보면서 자전거를 살짝 세워서 아이하고 얼마나 샛노란 빛결인가를 느껴 봅니다.

군내버스가 지나가는 큰길 한쪽에는 돌콩이 자랍니다. 아무도 안 심었고 누구도 안 돌보지만 아주 조그맣고 까만 콩이 맺힙니다. 꼭 이맘때에 맺혀요. 따로 훑는 사람이 없으니 그저 돌콩 스스로 꼬투리를 터뜨려 자꾸자꾸 그 자리에서 새삼스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살몃살몃 마실을 돌면서 돌콩 열매를 조금 훑습니다. 여덟 살 큰아이가 야무진 손놀림으로 잘 훑습니다. 다섯 살 작은아이는 자전거수레에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조용한 시골길입니다. 여느 때에는 자동차 한 대조차 볼 수 없는 시골길입니다. 그래도 이제 한가위라고 자가용이 한 대씩 드문드문 지나갑니다. 자가용은 이 마을 저 마을로 천천히 들어섭니다. 우리 마을에도 이웃 마을에도 ‘아이’를 구경할 수 없는데, 아이 둘을 이끌고 이 시골길을 걷는 젊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납니다. 틀림없이 이 한가위에 맞추어 도시에서 시골로 찾아온 분입니다. 시골에서는 바로 이 시골길 걷기가 아주 좋아요. 자동차는 거의 지나갈 일이 없으니 호젓하고, 자동차가 지나갈 일이 없이 풀벌레 노랫소리가 흐르니, 서로 아무 말 없이 걸어도 푸근합니다. 도시에서 늘 자동차와 기계와 확성기 소리 따위에 길들던 아이들도 모처럼 모든 기계 소리가 없는 호젓하고 고요한 시골길을 걸으면서 새로운 마음이 될 수 있겠지요.

시골길은 어리광을 부리며 걸을 수 있습니다. 시골길은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면서 걸을 수 있습니다. 시골길은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습니다. 시골길은 이야기꽃을 피우고 웃으면서 걸을 수 있습니다.

한가위에 누릴 가장 기쁜 일이라면 아무래도 바로 이 한 가지이리라 느낍니다. 호젓하게 마음하고 몸을 달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웃음잔치. 시골마을에서 하루를 머물든 이틀이나 사흘을 묵든 모든 ‘도시 이웃’이 마음 가득 이야기꽃이랑 웃음잔치를 담으면서 넉넉할 수 있기를 빕니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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