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둑에 꽃무릇 살짝


  마을 할배는 예초기로 논둑에 자라는 풀을 몽땅 민다. 틈틈이 농약을 뿌려서 태워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가을에 논둑에 꽃무릇 두어 송이가 핀다. 어라, 마을 할배가 왜 꽃무릇은 안 베셨지? 다른 풀은 모조리 베고 꽃무릇만 안 벤 티가 아주 또렷하게 난다. 논둑길을 걷다 보니 다른 곳에서도 꽃무릇을 안 벤 자리가 있다. 다른 풀과 들꽃은 모조리 베더라도 차마 꽃무릇까지는 벨 수 없다고 여기셨을까. 그런데, 꽃무릇을 안 벤 때를 헤아리니 아직 꽃무릇에 꽃송이가 터지지 않을 때였다. 다른 풀하고 섞여서 꽃무릇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었을 텐데, 또는 예초기로 밀다가 그냥 슥 밀어서 모조리 잘라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꽃무릇 두어 송이는 논둑으로 퍼져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까지 올린 뒤, 바야흐로 꽃송이를 터뜨렸다. 날마다 더욱 노랗게 무르익는 논배미 사이에서 두어 송이가 앙증맞게 피어나면서 새로운 빛결을 베풀어 준다. 4348.9.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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