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에서



  풀밭에 앉는다. 풀밭이 있으니 풀밭에 앉는다고 할 수 있고, 풀밭을 찾아서 한참 걷다가 풀밭에 앉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풀밭에 앉을 적하고, 아스팔트 길바닥에 앉을 적하고 다르다. 나무걸상에 앉을 적하고 시멘트걸상이나 쇠붙이걸상에 앉을 적하고 다르다. 마룻바닥에 앉을 적하고 시멘트바닥에 앉을 적이 다르고, 나무책상을 끼고 앉을 적하고 플라스틱책상을 끼고 앉을 적이 다르다.


  풀밭은 흙이 있는 곳이다.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바닥이라면 자동차가 다니는 곳이다. 풀밭은 온갖 목숨이 자라는 곳이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는 모든 목숨을 짓밟은 곳이다. 나는 사람이라는 목숨이요, 밥이라는 목숨을 먹으면서 살기에,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이 아닌, 흙바닥이나 풀밭에 앉으려 한다. 맨발로 풀밭에 앉고, 맨손으로 풀포기를 쓰다듬고 싶다.


  책이라고 하는 물건은 공장에서 찍으나, 책이 될 종이는 숲에서 자란다. 숲이 나무를 키우고, 숲에서 모든 밥이 나오며, 숲 둘레에서 삶자리를 이룬다.


  풀내음을 맡으며 마음을 쉰다. 풀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연다. 풀빛을 바라보며 마음이 고요하다. 풀결을 느끼며 책마다 다르게 흐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책은 책꽂이에 꽂되, 책을 쥔 사람들은 누구나 호젓하게 풀밭에 앉아서 책을 펼칠 수 있기를 꿈꾼다. 책을 펼치면서 놀다가, 책을 내려놓고 풀밭에서 뒹굴 수 있기를 꿈꾼다. 4348.8.3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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