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도화중학교 청소년하고 '책 이야기'를 나누려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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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책빛 먹기

24. 문학책을 읽는다



  시는 문학입니다. 수필과 소설도 문학입니다. 희곡도 문학입니다. 시집이나 수필책이나 소설책이나 희곡집은 모두 문학책입니다. 그러면, 시나 수필이나 소설이나 희곡이라고 하는 문학에는 무엇을 담을까요? 문학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문학이 될까요?


  모든 문학에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담지 않는다면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없이 틀거리(형식)만 시를 닮거나 수필을 닮거나 소설을 닮거나 희곡을 닮는대서 문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이나 무늬만 보면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요.


  이야기를 담을 적에는 틀거리가 엉성하더라도 아름다운 문학이라고 말합니다. 이야기를 담지 못할 적에는 틀거리가 빈틈없더라도 문학이라는 이름조차 안 붙입니다. 커다란 음식점을 보면 길가에 유리 진열장을 마련해서 ‘모조품 요리’를 놓기도 합니다. 참말로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놓은 ‘모조품 요리’입니다만, 이 모조품을 가리켜서 ‘요리’나 ‘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조품’이거나 ‘인형’이거나 ‘거짓’이거나 ‘가짜’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을 훔치거나 가로채서 뽐내려 할 적에도 ‘거짓’이라고 해요. 이때에는 ‘훔친 것’이라는 이름까지 붙습니다. 이른바 문학에서 ‘표절’이라고 하는 작품은, 겉보기로는 매우 뛰어나 보이기도 할 수 있으나, 표절 작품은 ‘거짓 작품’이거나 ‘훔친 작품’이지요. 다른 사람 작품을 훔치면서 제 이름값을 높이거나 돈을 벌려고 하는 몸짓으로 쓴 글은 ‘문학’이 아닙니다. 한때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더라도, 참모습이 드러난 날부터 이러한 글은 믿음을 모조리 잃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지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975년부터 2015년까지 전남 보성에서 집배원으로 일한 류상진 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마흔 해에 걸쳐 시골마을 집배원으로 일한 발자취를 손수 찬찬히 적바림해서 《밥은 묵고 가야제!》(봄날의책,2015)라는 책을 선보였습니다.


  시골 집배원이 쓴 책을 놓고 ‘문학’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골 집배원은 이녁 이야기를 이녁 누리사랑방(블로그)에 올렸을 뿐, 문학잡지에 이녁 글을 올린 적이 없습니다. 시골 집배원으로서 쓴 글을 신춘문예 같은 자리에 보낸 적이 없고, 문학상을 탄 적이 없습니다. 그저 시골 집배원입니다. 시인이나 수필가나 소설가 같은 이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집배원’이라는 이름만 있습니다.


  시골 집배원 류상진 님이 쓴 책을 보면, “금메 영남떡이 아니고 율리떡이랑께 그라네!”(27쪽)라든지 “그랄지 알았으문 내가 회령 장터에 있는 택배로 갖고 가서 부치껏인디!”(82쪽)라든지 “금메 그란당께! 딴 집에 더 크고 널룹고 이삔 편지통도 많은디 해필 우리 집 째깐한 통에다 새끼를 까놨당께. 안 쫍은가 몰것네!”(153쪽)라든지 “와따아! 이 사람아, 그란다고 술 한 잔 묵을 시간도 읍서?”(217쪽)라든지 “안 그래도 애기들은 온다 그란디 방은 차디차고, 그라다 우리 손지들 감기라도 걸리문 또 ‘할메가 지름 애낄라고 방에 불도 안 때놨다!’ 그라문 으짜껏이여?”(284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시골마을 할매랑 할배가 집배원 일꾼한테 들려준 말입니다. 시골 집배원으로 일하는 분은 이녁이 늘 마주하는 시골 할매랑 할배가 들려주는 말을 고스란히 ‘마음에 담은’ 뒤 글로 차근차근 옮겼습니다. 《밥은 묵고 가야제!》라는 책에 나오는 온갖 이야기는 ‘전남 보성 고장말’입니다.


  시골사람이 쓰는 시골말은 표준말이 아닙니다. 서울처럼 커다란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쓰는 서울말은 시골말이 아닙니다. 서울말은 표준말이 되고, 표준말은 서울말이 됩니다. 모든 신문과 방송과 책은 서울말이자 표준말로 나옵니다. 내가 쓰는 이 글도 시골말이 아닌 서울말이거나 표준말입니다. 내 입에서는 시골말이 흐르더라도 내 글은 서울말이거나 표준말이 되어야 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를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밥은 묵고 가야제!》라는 책에 나오는 시골 할매랑 할배 이야기를 ‘전남 보성 시골말’이 아닌 ‘서울 표준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이때에는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시골에서 흙을 부치면서 사는 할매랑 할배가 날마다 빚는 이야기를 ‘서울 표준말’은 어느 만큼 담아낼 만할까요?


  시골 말씨를 써야 꼭 시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습니다. 시골 말씨가 아니어도 시골 이야기는 얼마든지 잘 들려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겉모습이 아닌 알맹이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껍데기가 아닌 속마음으로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이 따스하기에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로 보살피는 사랑이 곱기에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시나 수필이나 소설이나 희곡이라는 이름이 붙는 문학은, 바로 이 대목을 살필 때에 태어납니다.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따사로이 나누는 이야기가 될 때에 문학이 됩니다.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여러 틀거리로 알맞게 짜서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로 가꿀 수 있으면 언제나 문학이 됩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문예창작학과를 다녀야 문학을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 흐르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 이야기를 찬찬히 헤아리면서 즐겁게 글로 옮기면 모두 문학이 됩니다. 문학상을 받거나 문학잡지에 글을 실어야 문학을 하지 않습니다. 글 한 줄을 쓴 적이 없더라도 ‘입으로 구성지거나 구수하거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삶을 짓는다면, 이때에도 아름다운 문학을 하는 셈입니다. 입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삶은, 전문용어를 빌자면 ‘구비문학’입니다.


  다만,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정보나 소식을 입으로 읊는 일은 문학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겪은 일을 내 나름대로 마음으로 삭여서 이웃하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할 적에 비로소 문학입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헤아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면, 이러한 이야기도 문학입니다.


  문학책은 종이로 묶은 책으로도 읽고, 이웃이나 동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삶으로도 읽습니다.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로도 문학을 즐기고, 마을 할매랑 할배가 입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로도 문학을 맛봅니다. 4348.7.8.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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