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렌지와 마음 나누기


  우리 집 가스렌지가 지난해부터 잘 안 켜진다. 왜 이렇게 안 켜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곁님은 가스렌지를 잘 안 닦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참말 그럴까? 그러나 한 가지는 알 듯 말 듯싶었다. 아무래도 늘 불을 얻어서 밥을 짓도록 도와주는 가스렌지인데, 이 아이를 알뜰히 아끼는 마음이 옅거나 사라졌거나 잊혀졌구나 싶었다. 어느 날 부엌을 요모조모 치우면서 가스렌지를 뒤집어서 앞뒤로 구석구석 말끔히 닦아 준다. 이렇게 닦은 뒤에 가스불이 잘 켜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홀가분했다. 왜 진작 이렇게 정갈하게 닦아 줄 생각을 안 했을까.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이렇게 가스렌지한테, 그러니까 우리 집 살림살이한테 제대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이러구러 날이 흐르고 흐르던 어느 날, 곁님이 문득 한 마디 한다. 아무래도 이 가스렌지를 서비스센터에 보내서 고쳐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냔다. 이때 아주 빠르게 내 마음으로 몇 마디 이야기가 스쳤다. ‘얘(가스렌지)야, 너 이 집 바깥으로 멀리 다녀오고 싶니?’ ‘아니!’ ‘그럼 너 어쩔래?’ ‘몰라!’ ‘네가 하루 빨리 살아나서 불이 잘 붙으면 돼.’ ‘그러면 돼?’ ‘그래. 기운 내렴. 사랑스러운 아이야.’

  이런 이야기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빠르기로 흘렀다. 저녁을 짓는 자리라서 이 번갯불 콩 구워 먹는 이야기는 곧 잊었다. 오늘 아침에 아이들한테 밥을 지어서 차려 주려고 가스불을 켜다가, 엊그제 가스렌지와 마음으로 나눈 이야기가 불쑥 떠오른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떠오르지, 하고 생각하다 보니, 며칠 앞서, 나는 참말 가스렌지하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구나 싶고, 가스렌지가 나한테 마음을 열어서 보여주었기에, 나는 가스렌지를 더 살가이 바라보면서 다룰 수 있을 뿐 아니라, 엊그제부터 우리 집 가스렌지는 ‘구멍 세 군데’ 모두 불이 잘 켜진다. 그동안 세 구멍 모두 불이 잘 안 켜지다가 구멍 하나만 더러 불이 켜졌는데, 오늘 아침도 엊저녁도 세 구멍 모두 불이 잘 켜진다.

  가스렌지한테 한 일이란 따로 없다. 그저 마음으로 ‘너를 이 집 바깥으로 멀리 보내기 싫은데 너는 어떻게 하겠니?’ 하고 묻는 내 마음이 번갯불처럼 떠올랐고, 이 마음을 가스렌지가 받아들여 주었으며, 서로 몇 마디를 빠르게 주고받은 지 며칠이 지나서 가스렌지도 내 몸짓도 바뀌었다. 4348.6.1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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