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농증 수술 안 하기’와 ‘숨쉬기’



  내가 처음으로 병원에 간 때가 언제인 지 떠올리지 못한다. 다만, 무척 어릴 적부터 병원을 드나든 줄은 안다. 다섯 살인지 일곱 살인지 이무렵에도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떠오르는데, 내가 떠올리는 병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비인후과이고, 다른 하나는 피부과이다. 치과도 자주 다녀야 했지만, 다른 어느 곳보다 이비인후과와 피부과를 자주 다녔다. 이비인후과는 한 주 가운데 닷새나 엿새를 다녔고, 피부과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올 적부터 가을이 될 때까지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축농증 진단을 아마 다섯 살인가 일곱 살 때에 처음 받았고,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까지 그야말로 이비인후과 마실을 늘 다녀야 했다. 피부과는 중학교에 들어선 뒤에는 더 다니지 않았다. 왜 그러한가 하면, 중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학교에 매인 채 지냈으니 햇볕을 쬘 일이 너무 적었다. 국민학교에 다닐 적에는 여름에 반소매나 민소매를 입고 몇 시간쯤 해를 쬐면 팔뚝과 어깨까지 살갗이 다 일어나서 벗겨졌고, 반바지를 입으면 살이 드러나는 자리가 모두 일어나서 벗겨졌다.


  아무튼 이비인후과를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하니 집에서도 진료비를 대느라 만만하지 않았을 텐데, 병원에서는 하루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 나를 꽁꽁 묶어서 입원을 시킨 뒤 수술을 시키려던 일도 몇 차례 있었다. 이때마다 대단히 무섭고 싫어서 엄청나게 몸부림이랑 발버둥을 쳤기에 가까스로 수술은 안 받았고 진료만 받고 약을 탔다. 축농증 약은 국민학교에 들 무렵부터 먹었지 싶은데, 이 약은 군대에 갈 무렵이 되어서야 더 먹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이런 약을 주지도 않으니까.


  어떤 이는 소금물을 코에 넣으면 좋다고 하지만, 나는 소금물을 코에 넣기도 쉽지 않았고, 소금물을 코에 넣어도 코가 뚫리지 않았다. 딱히 어떤 수도 쓸 수 없이 늘 코가 막히거나 콧물이 흐르는 채 고단하게 숨을 쉬면서 서른 몇 해를 살았다. 어릴 적부터 ‘숨쉬기’를 놓고 언제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를테면, 엄청난 돈과 ‘숨쉬기’가 있을 적에, 내가 무엇을 고르겠는가 하는 대목에서 ‘숨쉬기’를 고르겠노라 하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수술로는 코를 고칠 수 없다고 느꼈다. 돈이 아니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기’를 바랐고, 숨을 쉬면서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기를 바랐다.


  숨 쉬는 걱정이 없는 사람은 모를 텐데, 늘 코가 막혀서 괴로운 사람은 하루 스물네 시간을 ‘숨 쉬는 소리’를 늘 듣거나 느낀다. 저절로 부드럽게 쉴 수 있는 숨이 아니라, 힘을 들여서 쉬어야 하고, 코가 자주 막히지만, 코를 후빈들 코를 풀든 코가 뚫리지 않으니 언제나 코가 맹맹하고 머리가 띵하다. 이제 와 돌아보니, 늘 코가 아프고 괴로우니, 나 스스로 ‘내 삶을 깊이 생각하는 일’조차 제대로 할 틈을 못 내기도 했겠구나 싶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숨을 못 쉬어서 가슴이 답답하고 죽을 노릇인데, 다른 어느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숨을 한 번 쉴 적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죽을 노릇인 사람이 어떤 꿈을 가슴에 품을 만할까.


  때때로 숨을 잘 쉴 수 있기도 하다. 바람이 매우 맑은 곳에 있거나, 풀내음이 짙게 흐르는 곳에서는 숨을 잘 쉰다. 그러고 보니, 내가 김매기나 풀베기를 안 좋아하는 까닭은 ‘코가 나빠서 숨을 잘 못 쉬지만, 풀내음이 짙게 흐르는 곳에서는 숨쉬기가 어렵지 않’으니, 풀을 베는 일이 달갑지 않다고 몸으로 느꼈구나 싶다. 그리고, 머리를 깨우치는 슬기로운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자리에서도 문득 ‘숨쉬기’를 잊는다. 새로우면서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맞아들일 적에도 으레 ‘숨을 쉬기가 괴롭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요즈음 들어서 나는 숨쉬기가 무척 부드러워졌다. 꽁지뼈 언저리부터 불바람을 일으켜서 가슴을 지나 머리 뒤꼭지와 이마로 이 불바람이 터져나오도록 하는 숨쉬기(C & E)를 제대로 익혀 꾸준히 이 숨쉬기를 한 뒤, 언제부터인가 ‘나한테 서른 몇 해 묵은 축농증이 있다’는 대목을 잊었다. 그동안 숨쉬기가 늘 괴로워서 잠자리에 들 적마다 몹시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냥 잘 잔다. 참말 나한테 축농증이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아주 가끔 콧물이 조금 나면, ‘아, 그래, 내가 어릴 적에 이 콧물 때문에 날마다 죽어났지. 늘 코가 빨개야 했지.’ 하고 되새긴다.


  코가 뚫려서 비로소 숨을 부드럽게 쉴 뿐 아니라 ‘숨을 쉬어야 산다’고 하는 생각에서 홀가분하게 놓여나니, 내 몸을 이루는 빛띠가 돌아가는 소리를 또렷하게 듣는다. 이제껏 코맹맹 소리와 코훌쩍 소리 때문에 듣지 못하던 온갖 소리를 하나하나 새롭게 듣는다. 그리고, 그동안 제대로 못 하고 살던 ‘생각하기’도 요즈음에는 조금씩 한다. 그동안 ‘생각하기’를 꽤 오랫동안 못 하고 살다 보니 ‘생각하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아주 잊은 듯한데, 차근차근 하루하루 생각을 하면서 지낸다.


  1980년대 첫무렵에 축농증 수술비는 꽤 비쌌다. 요새는 이백만 원 즈음이면 된단다. 불바람을 일으키는 숨쉬기를 하면서 축농증이 내 몸에서 떨어지도록 했으니, 돈으로 치면 나는 얼마쯤 번 셈일까. 아니, 이를 돈값으로 따질 수 있을까. 몸에 칼을 대지 않고 몸을 낫게 했으니, 나는 스스로 내 길을 연 셈이고, 어릴 적에 수술대에 눕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악을 쓰듯이 온몸과 온마음이 새겼던 ‘죽어도 축농증 수술은 안 해, 수술 안 하고 낫고야 말겠어’를 이루었다. 이를 이룬 지 꽤 된 듯한데, 오늘에서야 ‘아, 내가 나한테서 축농증을 참말 떨쳤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왜 오늘에서야 이를 알아차렸을까? 요즈음 들어 비로소 ‘생각하기’를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오늘 집에서 곁님이 나한테 ‘생각하며 살기’를 건드려 주어서 비로소 이 여러 가지가 그림처럼 하나씩 떠오른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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