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93] 다 함께 걸으면서 본다
― 바람과 볕과 나무하고 어깨동무
바다로 갈 생각을 하면서 논둑길을 걷습니다. 자가용을 거느리지 않는 우리 집 사람들은 다 함께 씩씩하게 걸어서 바람을 가르고 햇볕을 쬡니다. 자가용이 있으면 십 분 남짓 달리면 닿는 바닷가이고, 두 다리로 걸어서 가자면 여러 시간이 걸리는 바닷가입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납니다. 논둑길을 노래하면서 걷습니다. 삼십 분 남짓 걸어서 이웃마을에 닿습니다. 이웃마을 앞은 큰길입니다. 이 큰길에는 바다와 맞닿은 마을까지 가는 시골버스가 두 시간에 한 차례 지나갑니다. 다만, 포구가 있는 바닷마을로 달리는 버스일 뿐, 모래밭이 있는 바닷가로 가는 버스는 아닙니다. 그래서, 포구마을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숲길 어귀에서 내려야 합니다. 숲길 어귀에서 오십 분쯤 더 걸어가면 드디어 바다입니다.
걸어가면서 땅을 밟습니다. 걸어가면서 하늘을 봅니다. 걸어가면서 바람을 마십니다. 걸어가면서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걸어가면서 왜가리를 만납니다. 걸어가면서 논꽃과 들꽃과 숲꽃을 마주칩니다. 걸어가면서 이웃마을 할매와 할배한테 인사합니다. 걸어가면서 두 아이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기 놀이를 합니다.
다 함께 걸어가면서 오월바람을 한결 짙게 마십니다. 다 함께 걸어가면서 오월볕을 한결 따뜻하게 누립니다. 다 함께 걸어가면서 찔레꽃내음과 국수꽃내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한 시간 남짓 걸으면 아이들은 슬슬 다리가 아픕니다. 이즈음부터 아이들을 하나씩 업거나 안습니다. 아이들은 어느 만큼 업히거나 안겨서 걸으면 다시 기운을 차립니다. 새로운 몸과 마음이 되어 또 신나게 걷거나 달리면서 놉니다.
자가용이 있어서 십 몇 분 만에 바닷가까지 씽 하고 달릴 적에도 찔레꽃내음이나 국수꽃내음을 맡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자가용으로 씽 하고 달리면, 찔레꽃내음이나 국수꽃내음을 고작 몇 초쯤 마시고 맙니다. 두 다리로 천천히 걸어서 가면, 찔레꽃내음도 국수꽃내음도 몇 분 동안 마실 수 있고, 걷는 내내 마실 수 있으며, 때로는 아예 눌러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꽃내음에 폭 안길 수 있습니다.
걷는 까닭은 더 빨리 갈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걷는 까닭은 일부러 늦게 가려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걷는 까닭은 다 함께 이 길을 걸으면서 모든 아름다운 숨결을 맞아들이고 모든 사랑스러운 바람과 볕과 흙과 나무와 꽃과 풀과 벌레와 개구리를 이웃으로 어깨동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4348.5.1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고흥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