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행을 떠난 펭귄, 화이트블랙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43
한스 아우구스토 레이.마르그레트 레이 글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29



아이들한테 ‘여행’은 무엇일까

― 세계 여행을 떠난 펭귄, 화이트블랙

 한스 아우구스토 레이·마르그레트 레이 글·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2002.8.20.



  사뿐사뿐 얌전하거나 조용하게 걷는 아이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뜀뛰는 걸음’으로 다니기 마련입니다. 바빠서 뜀뛰듯이 걷지 않습니다. 그저 홀가분하면서 기쁘게 뜀뛰듯이 걷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활짝 웃고, 아주 자그마한 선물 하나에도 밝게 노래합니다. 작은 몸짓이 큰 날갯짓이 되듯이 뛰고 달리고 웃고 노래하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뛰거나 달리지 못하게 막습니다. 오직 운동장에서만 뛰거나 달릴 수 있는데, 바깥에서 뛰거나 달려도 뛰지 말거나 달리지 말라고 막기 일쑤입니다. 학교 바깥으로 나가면 자동차가 많으니 천천히 둘레를 살피면서 걸으라고 시킵니다. 자동차 걱정이 없는 곳에서는 시끄럽게 굴면 안 되고, 자동차 걱정이 있는 곳에서는 얌전히 굴어야 하는 오늘날 아이들인 셈입니다.





.. 라보눈 방송국은 펭귄나라의 방송국이에요. 거꾸로 읽으면 눈보라 방송국이 되지요. 이 방송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꾼은 펭귄 화이트블랙이에요. 그런데 화이트블랙에게 걱정이 생겼어요. 이야깃거리가 떨어졌거든요 ..  (2쪽)



  아이들은 한국에서 미국이나 프랑스나 남극이나 아프리카나 인도 같은 곳을 찾아가야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웃나라를 모릅니다. 아이들은 이웃마을도 모릅니다. 이웃나라나 이웃마을은 ‘어른이 흔히 말하거나 알려주니’까 비로소 알 뿐입니다.


  아이들은 홀가분하게 뛰놀 수 있는 곳이 즐겁습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거나 달리거나 뒹굴 수 있는 곳이 재미있습니다. 낯선 나라로 찾아가야 여행이 되지 않습니다. 먼 나라에 여러 날 머물러야 여행이 되지 않습니다. 호텔에서 묵거나 기차를 타야 여행이 되지 않습니다.


  느긋하게 걸으면서 웃고 노래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여행길, 그러니까 마실길이 됩니다. 신나게 놀고 뛰면서 지낼 수 있는 자리가 비로소 여행터, 그러니까 마실터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날마다 여행을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날마다 마실을 합니다. 집안에서도 날마다 새롭게 마실을 합니다. 집밖에서도 언제나 새롭게 마실을 누립니다. 마루와 마당과 부엌을 오가는 걸음도 기쁜 마실이 됩니다. 이웃집이나 학교나 우첵구을 다녀오는 길도 멋진 마실이 됩니다. 마음이 넉넉하고 즐거울 때에는 모든 걸음걸이가 마실이 됩니다.




.. “여행하면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화이트블랙은 너무나 지루해서 깜박 잠이 들었어요. 그러다 우지끈! 깜짝 놀라서 잠이 깼어요. 배가 빙산에 부딪힌 거예요! 배는 무서운 속도로 가라앉고 있었어요. “배를 잃어버린 건 아쉽지만 라디오에서 이야기할 거리는 되겠지. 게다가 사고도 한번 당해 봤으면 했는데, 잘 됐다.” ..  (5쪽)



  한스 아우구스토 레이 님과 마르그레트 레이 님이 함께 빚은 그림책 《세계 여행을 떠난 펭귄, 화이트블랙》(시공주니어,2002)을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두 레이 님이 1930년대에 처음 그렸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번지던 전쟁 불길에서 벗어나려고 자전거에 챙긴 그림꾸러미였고, 두 레이 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림책을 그리며 사는 동안 오랫동안 잊고 지낸 그림꾸러미였다고 합니다. 예순 해 가까이 짐꾸러미 사이에서 묵다가 뒤늦게 빛을 본 그림책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그림책이니, 이 그림책에 나오는 배(군함과 고기잡이배)는 퍽 예스러워 보입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펭귄이 남극에서 다닌다는 ‘라보는 방송국’은 라디오 방송국입니다.


  아무튼, 그림책에 나오는 펭귄은 남극에서 라디오 방송을 이끈다고 하며, 어느 날 문득 방송국에서 사람들한테 들려줄 만한 ‘이야깃거리’가 바닥이 났다고 여겨서 새로운 곳으로 나들이를 떠나자고 생각합니다.


  쪽배를 타고 홀로 길을 나섭니다. 쪽배를 타고 한참 바다를 가로지르다가 졸려서 잠이 듭니다. 그만 얼음덩이에 부딪혀서 쪽배가 부서지고, 전쟁터로 가는 군함에 살짝 올라탑니다. 군함에서 대포에 숨었는데, 대포를 쏘니 펭귄은 포알과 함께 멀리멀리 날아 아프리카에 떨어집니다. 아프리카에 떨어진 펭귄은 새로운 짐승을 만나고, 사막을 끙끙거리면서 가로지릅니다. 이러다가 비행기를 보고, 비행기에 함께 타며, 비행기를 타고 남극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다에 빠집니다. 고기잡이배에 잡히고, 깊은 밤에 고기잡이배에서 그물 하나를 훔쳐서 몰래 빠져나옵니다.


  이름이 ‘화이트블랙’이라는 펭귄은 아슬아슬한 고비를 숱하게 넘깁니다. 여느 펭귄으로서는 겪기 힘들 만한 일을 수없이 겪습니다. 펭귄 화이트블랙은 온갖 고비를 만날 적마다 생각합니다. ‘이 멋진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재미있다’고.




.. 밤이 되어 모두 잠들자 화이트블랙은 갑판으로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말리려고 널어 놓은 큰 그물 하나를 들고 바다로 뛰어들었어요. 화이트블랙의 생각이 맞았어요! 그물을 끌고 펭귄나라로 헤엄쳐 가는 동안, 물고기들이 그물에 걸렸어요 ..  (22쪽)



  남극으로 돌아간 펭귄은 오랫동안 재미난 이야기를 이웃하고 동무한테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다른 펭귄은 겪기 힘들거나 겪을 수 없던 일이었을 테니 몹시 재미나다고 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다만, 한 가지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꼭 세계 여행을 해야 ‘이야깃거리’가 많이 생기지 않습니다. 세계 여행은 ‘아슬아슬한 고비’가 많아야 하지 않습니다. ‘세계’란 내 보금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닙니다.


  펭귄 화이트블랙은 여행길에 나서면서 이야깃거리를 더 얻을 수 있습니다. 여행길에 나서지 않더라도 사랑을 하고 아기를 낳으면 이때에도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남극에 나무를 심어 본다면(그림책이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나무심기도 놀라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남극에 사는 짐승들마다 먼 옛날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귀여겨들어서 방송국에서 들려줄 수 있습니다. 지구와 우주가 태어난 수수께끼를 깊이 헤아리고 살피면서 이런 생각을 푸는 실마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꾸는 기쁨 꿈을 멋지게 풀어내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구름 이야기를, 하늘 이야기를, 눈 이야기를, 그러니까 펭귄 화이트블랙 둘레에 늘 있는 가장 수수한 이야기를 스스로 가장 아름답게 여미어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곁에 있는 삶을 언제나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새로운 숨결을 마십니다. 곁에 있는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없으면, 어느 곳으로 가든 새로운 눈길을 열기 어렵습니다. 4348.5.13.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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