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속에서 잠자다 창비시선 143
김진경 지음 / 창비 / 1996년 2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90



시와 꿈노래

― 별빛 속에서 잠자다

 김진경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6.2.28.



  잠이 들 적에 즐겁지 않은 날이 없는 채 삽니다. 고작 십 분이나 오 분만 눈을 붙여야 하더라도, 잠이 들 적에는 늘 즐겁다고 여깁니다. 이 일을 마치지 못했건, 저 일을 마무리짓지 못했건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잠이 들 적에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일을 내려놓습니다. 오직 잠 하나만 생각하면서 눈을 감습니다.



.. 밤새도록 소쩍새 울음이 창호지문에 젖는데 불도저 소리가 어둠의 한켠을 꺼내리고 있다 ..  (밤나무를 본다)



  내 삶이 기쁨이면 잠자리에 들면서 기쁜 이야기가 꿈으로 찾아옵니다. 내 삶이 기쁨이 아니라면 잠자리에 들 적에 기쁘지 않은 이야기가 꿈으로 찾아오거나 아무 꿈을 꾸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떠한지 모릅니다. 나는 이렇습니다.


  이러다 보니, 잠자리에 들 적에 아이들과 즐거이 노래합니다. 나로서는 가장 보드라우면서 따스한 목소리가 되어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잠자리에서 두 아이를 왼쪽과 오른쪽에 누여서 늘 자장노래를 부르는데, 내 목소리가 이토록 곱고 맑으며 싱그러운가 하고 놀랍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이 한 해 두 해 자라는 사이 내 목소리는 자장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를 부를 적에도 제법 들어 줄 만합니다. 다만, 들어 줄 만하다 하더라도 훌륭하거나 멋있다고는 여기지 않아요. 나도 이만큼 노래를 부르면서 아이들과 웃고 놀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 가을이 와서 / 노랗게 물들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  (은행나무)



  삶은 늘 꿈대로 이룬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꿈을 꾸는 대로 내 삶이 나아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 꿈을 꾸지 않는다면, 내 삶은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합니다. 나 스스로 꿈을 지으려 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내 일을 스스로 찾지 못해요.


  꿈을 꿀 수 있을 때에 내 길을 걷습니다. 꿈을 꿀 수 있기에 내 노래를 불러요. 꿈을 꿀 수 있는 하루이기에 내 사랑을 내 마음속에서 길어올립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자랑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추켜세울 일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내 꿈을 꾸면서 내 삶을 짓고 내 하루를 누립니다.



.. 억지로 술을 마신 날 / 담벼락 밑에 헛구역질을 하다가 / 담장 위로 보랏빛 눈을 뜬 수수꽃다리 ..  (낙타, 수수꽃다리 핀 골목에서)



  김진경 님 시집 《별빛 속에서 잠자다》(창작과비평사,1996)를 읽습니다. 김진경 님은 별을 우러르면서 어떤 꿈을 빌었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김진경 님이 스스로 바란 꿈은 어느 만큼 김진경 님 삶으로 드러났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빚잔치로 허덕이던 아픔을 이제는 씻으셨을까요. 아이와 놀지 못한 채 아이를 시무룩한 얼굴로 유치원에 보내던 앙금을 이제는 씻으셨을까요. 가난도 사회운동도 이제는 이럭저럭 말끔하게 털거나 씻으셨을까요.



.. 어릴 적 빚 받으려는 아주머니들 학교로 찾아와, 수업 대신에 등나무 아래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행방을 모른다거니, 맹랑한 놈이라거니, 사람의 소음에 지쳐 귀를 닫으면 멀리서 뻐꾹새소리 들렸다 ..  (칡꽃)



  아픔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픔은 좋지 않습니다. 앙금이나 얼룩이나 생채기는 나쁘지 않아요. 그렇다고 앙금이나 얼룩이나 생채기가 있어야 좋지 않습니다.


  아픔은 아픔일 뿐입니다. 앙금은 앙금일 뿐이에요. 내가 걸어가려는 길에서 겪거나 부딪히거나 만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멀리할 까닭도 가까이할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면서 내 꿈을 짓고 내 삶을 가꾸면서 내 넋을 사랑하면 됩니다.



.. 따뜻한 봄날 아침 철책 따라 길을 걷다가 병사에게 지명의 유래를 물으니 모른다 한다.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찔러총을 하는 병사들의 군홧발에 밟히는 노란 민들레 ..  (안인포구)



  밥을 짓고 빨래를 합니다. 이불을 말리고 아이들 손발을 씻깁니다. 밥을 차려서 아이들과 곁님을 먹이고, 부엌과 마루를 치웁니다. 온갖 일을 건사하느라 하루가 바쁩니다. 모든 일을 돌보느라 눈알이 빙그르르 돕니다. 그러나, 이런 일과 저런 살림을 맡으면서 노래를 하고 웃으며 춤을 춥니다. 참말 나는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면서 춤을 추어요.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가 춤추고 노래하면서 밥짓는 모습을 늘 지켜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가 빨래하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언제나 바라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가 잠자리뿐 아니라 자전거마실을 할 적에도 으레 노래하는 모습을 노상 봅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늘 노래를 불러요. 놀면서도 부르고, 잠자리에서 아버지가 목이 아파서 노래를 그만 부르면 아이들이 뒤이어서 부릅니다. 나는 아이들을 재우려고 자장노래를 부르지만, 요새는 내가 아이들 노래를 들으면서 먼저 곯아떨어지기 일쑤입니다.



.. 봉천동 가파른 계단 / 유치원 종일반에 가기 싫어 칭얼대는 / 아이를 업고 내려간다 ..  (한울이 도깨비 이야기)



  삶은 재미있습니다. 스스로 재미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되기에 재미있습니다. 삶은 슬픕니다. 스스로 슬프다고 여기는 마음이 되기 때문에 슬픕니다.


  어떤 삶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스스로 생각해야 해요. 어떤 사랑으로 삶을 짓고 싶은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해요. 어떤 생각을 마음에 심으면서 삶을 사랑스레 노래하고 싶은지 스스로 헤아려야 합니다.


  꿈이 되고 노래가 되는 삶입니다. 꿈과 노래를 고스란히 삶으로 드러내는 하루입니다. 우리 함께 시를 써요. 내 이야기를 시로 쓰고, 내 이야기를 이웃과 나누어요. 내 이야기를 노랫가락에 담아서 아이들한테 물려주어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이 땅에 까만 씨앗으로 심어요. 4348.4.1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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