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210) 시작 1
밖으로 나가자 하늘도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했다 … 아직 잠이 덜 깬 경비에게 일러두고, 병원으로 가는 논두렁길을 걷기 시작했다
《야마모토 토시하루-세상에서 가장 수명이 짧은 나라》(달과소,2003) 20쪽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했다
→ 조금씩 환해진다
→ 조금씩 밝아진다
…
나는 어릴 적에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놀곤 했습니다. 누군가 노래를 시키는데 딱히 부를 노래가 없거나 장난을 치고 싶으면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준비, 시이작!” 하고 외치면서 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이라는 낱말을 듣고 새기고 말하고 썼는지 잘 모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둘레에서 익히 말했고 손쉽게 들었습니다.
노래 불렀다가 노래 끝났다
자, 달려!
나는 어릴 적에 왜 “노래 불렀다가 노래 끝났다”처럼 말하면서 놀지 못했을까요? 어릴 적에 “자, 달려!” 하고 말하기도 했는데, 왜 “준비, 시작”이나 “준비, 땅”이나 “요이, 땅” 같은 일본말을 써야 했을까요? 왜 예전에는 이런 일본말을 제대로 짚거나 바로잡아 주는 어른을 찾아보기 어려웠을까요?
어느 때에는 ‘시작’이라는 말이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불렀으며 장난과 놀이를 즐겼습니다. “시작과 끝”이라고들 말하기도 하지만 “처음과 끝”이라고도 말합니다. “공연이 시작되었어”라고도 말했지만 “공연을 해”라고도 말했습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나 “시작도 끝도 없다”처럼 쓰는 분이 많지만,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나 “처음도 끝도 없다”처럼 쓰는 분이 있고, “수업을 한다고 알리는 종소리”처럼 쓰는 분이 있습니다.
논두렁길을 걷기 시작했다
→ 논두렁길을 걸었다
→ 논두렁길을 걷기로 했다
→ 논두렁길을 걸어 보았다
한국사람이 일본말을 쓴다고 해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말뿐 아니라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중국말을 섞어서 쓸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한국사람이 이웃이나 동무한테 한국말이 아닌 외국말을 섣불리 섞어서 쓴다면, 서로 못 알아들을 수 있어요. 때로는 지식 자랑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바이바이’처럼 무척 널리 쓰는 영어나 ‘시작’처럼 매우 널리 쓰는 일본 한자말은 어떤 말이 될까요?
이야기가 시작되다 → 이야기를 하다 / 이야기를 열다
회의가 시작되다 → 모임을 하다 / 모임을 열다
곧 학기가 시작하면 바빠질 것이다
→ 곧 새 학기가 되면 바쁘다
날이 어둡기 시작했다
→ 날이 어두워진다
→ 날이 어둑어둑진다
날이 밝기 시작한다 → 날이 밝는다
한국말에서는 따로 ‘시작’을 붙이지 않고 ‘하다’ 꼴로 씁니다.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가 아닌 “밥을 먹습니다”이고, “길을 가기 시작한다”가 아니라 “길을 간다”입니다. “이제 막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는데”가 아니라 “이제 막 이야기를 듣는데”예요.
처음 . 첫
첫끈 . 첫삽 . 첫머리 . 첫술 . 첫발
때와 곳을 살펴서 ‘처음’이나 ‘첫’ 같은 말을 넣을 수 있습니다. ‘첫끈’이나 ‘첫삽’이나 ‘첫머리’나 ‘첫술’이나 ‘첫발’ 같은 말을 넣어도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맨 처음”을 가리키는 ‘꽃등’이라는 오래된 한국말도 있습니다.
곰곰이 헤아리고 살펴서 알맞게 쓰면 됩니다. 4337.4.24.흙/4342.6.19.쇠/4348.3.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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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자 하늘도 조금씩 환해진다 … 아직 잠이 덜 깬 지킴이한테 일러두고, 병원으로 가는 논두렁길을 걸었다
지키는 사람을 가리켜 한자말로 ‘경비(警備)’로 적습니다. 우리는 ‘경비는 경비일 뿐’이라고 여기지만, 경비 같은 낱말을 쓴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경비원(警備員)’도 그렇고, ‘수위(守衛)’도 그렇습니다. 그나마 등대를 지키는 사람을 두고는 ‘등대지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등대경비’나 ‘등대경비원’처럼은 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 말투와 말씨를 헤아리면서 ‘건물지기’나 ‘건물지킴이’, 또는 ‘학교지기’나 ‘학교지킴이’, 아니면 ‘바다지기’나 ‘바다지킴이’ 같은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산림감시원(山林監視員)’이 아닌 ‘산지기’나 ‘산지킴이’나 ‘숲지기’나 ‘숲지킴이’ 같은 이름을 빚어내어 쓸 수 있습니다. 단출하게 ‘지킴이’나 ‘지기’라고만 써도 잘 어울립니다.
시작(始作)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 공연 시작 / 업무 시작 /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 시작도 끝도 없다 /
이야기가 시작되다 / 회의가 시작되다 /
이제 곧 학기가 시작하면 바빠질 것이다 / 날이 어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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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한 말 바로잡기
(820) 시작 2
내가 뒤늦게 글쓰기라는 걸 시작하여 체험수기류의 잡문이나마 열정을 가지고 끼적일 수 있었던 건 내 팍팍한 삶에서 빚어지는 나와 세상의 긴장감 덕이었다
《김규항-비급 좌파》(야간비행,2001) 179쪽
뒤늦게 글쓰기라는 걸 시작하여
→ 뒤늦게 글쓰기라는 걸 해서
→ 뒤늦게 글쓰기라는 걸 알아서
→ 뒤늦게 글이라는 걸 써서
→ 뒤늦게 글이랍시고 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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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고, 뒤늦게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뒤늦게 처음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뒤늦게 나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뒤늦게 해서”라고만 적으면 되고, “뒤늦게 알아서”라고 적어도 됩니다. ‘처음으로’를 꾸밈말처럼 넣어도 잘 어울립니다. 4337.8.6.쇠/4348.3.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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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뒤늦게 글쓰기라는 걸 해서 내 삶을 어쭙잖게나마 힘을 내고 끼적일 수 있던 까닭은 내 팍팍한 삶에서 나와 세상이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이었다
“체험수기(體驗手記)류(類)의 잡문(雜文)이나마”는 “내 삶을 어쭙잖게나마”나 “내 이야기를 어설프게나마”로 손보고, “열정(熱情)을 가지고”는 “힘을 내고”나 “씩씩하게”나 “기운차게”나 “힘껏”이나 “다부지게”로 손봅니다. “있었던 건”은 “있던 까닭은”으로 손질하고, “내 팍팍한 삶에서 빚어지는 나와 세상의 긴장감(緊張感) 덕(德)이었다”는 “내 팍팍한 삶에서 나와 세상이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이었다”나 “내가 팍팍하게 살며 세상과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이었다”로 손질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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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한 말 바로잡기
(826) 시작 3
그는 20대에 접어들면서 아르헨티나의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 비올레따는 유년시절부터 기타와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배윤경-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이후,2000) 61, 63쪽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다
→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기타와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 기타와 노래를 배운다
→ 기타와 노래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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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끝을 늘이면서 ‘시작’을 붙입니다. 말끝을 늘이면서 ‘것’을 붙이는 말씨하고 비슷합니다. 말끝을 늘이고 싶다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하겠다면 이렇게 할 노릇이지만,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기로 한다”라든지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기로 했다”처럼 쓸 수 있습니다. 더 생각해 본다면, “떠돌아다니며 지냈다”나 “떠돌아다니며 살았다”나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나 “떠돌아다니며 사람들하고 어울렸다”처럼 쓸 수 있어요. 말끝을 늘이려 한다면, 이야기가 될 말을 붙여야 합니다. 기타를 배운 일을 나타낼 적에도 이와 같아요. “기타와 노래를 차근차근 배웠다”라든지 “기타와 노래를 하나하나 배웠다”라든지 “기타와 노래를 즐겨 배웠다”라든지 “기타와 노래를 둘레 어른들한테서 배웠다”처럼 말끝을 늘이면 됩니다. 4337.8.22.해/4342.6.19.쇠/4348.3.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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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무 살로 접어들면서 아르헨티나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다 … 비올레따는 어릴 적부터 기타와 노래를 배웠다
‘20대(二十代)에’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스무 살로’로 손볼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여러 지방(地方)”은 “아르헨티나 구석구석”이나 “아르헨티나 여러 곳”이나 “아르헨티나 이곳저곳”으로 손질하고, ‘유년시절(幼年時節)’은 ‘어릴 때’나 ‘어릴 적’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