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37 ‘짓다’와 ‘지우다’



  짓는 사람은 늘 손수 짓습니다. 지우는 사람은 언제나 남한테 맡깁니다. 짓기에 손수 가꿉니다. 지우기에 언제나 남한테 손을 벌립니다.


  삶은 짓습니다. 삶은 지우지 않습니다. 삶은 짓기에 늘 새롭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일을 좀 잘못했거나 엉터리로 했다고 여겨서 ‘지우려’고 하면 어찌 될까요. 지우려고 한대서 내가 걸어온 길이 사라지거나 없어질까요? 내가 일으킨 말썽이나 잘못을 지우려고 하면 참말 지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발자국이든 굳이 지울 까닭이 없습니다. 이제껏 어떤 길을 걸어왔어도 이제부터 새 발걸음을 지으면 됩니다. 지운다고 없어지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우려고 하면 자꾸 지울 생각에 파묻힙니다. 지우려고 하니까 외려 지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지저분해지고 맙니다.


  새로 지으려고 하면 지울 까닭이 없습니다. 새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짓는 사람은 지난날 어떤 말썽이나 잘못을 일으킨 적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 짓는 마음은 ‘감추거나 숨기거나 없애’려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짓는 마음은 스스로 새로 깨어나려는 마음입니다. 새로 짓는 마음은 스스로 삶을 새로 가꾸어서 돌보려는 마음입니다.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만 한 값을 치러야 하지 않습니다. 아니, 값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그저, ‘값을 치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앞에 놓고 이 아이를 꾸짖거나 윽박지르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얼차려를 줄 수 있습니다만,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따사롭게 타이르면서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안 바라볼 수도 있어요. 잘못을 저지르건 말건, 이 아이가 삶을 새로 짓도록 웃음과 노래로 이끌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을 간다고 해서 더 낫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다 다른 길입니다. 다 다른 길이되, 어느 길은 ‘주눅 드는 길’이고, 어느 길은 ‘가르치고 배우는 길’이며, 어느 길은 ‘사랑으로 삶을 짓는 길’입니다.


  짓는 삶은 새롭습니다. 이제껏 없던 것을 지으니 새롭습니다. 지우는 삶은 낡습니다. 이제껏 있던 것을 그저 붙잡거나 매달리니 낡습니다. 짓는 삶은 늙거나 아프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롭게 깨어나니까 늙을 일도 아플 일도 없지만, 늙음이나 아픔이라는 말을 아예 떠올리거나 그리지 않습니다. 지우는 삶은 늙거나 아픕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면서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을 하니까 늙거나 아플 일만 있습니다. 새로움이 없이 한곳에 고인 채 더 움직이지 않으니 늙거나 아픕니다. 지우는 삶은 언제나 늙음과 아픔만 떠올리거나 그립니다.


  새로운 일을 지으면 새롭습니다. 틀에 박힌 어떤 일을 붙잡으려고 하면 지치거나 괴롭습니다. 새로운 일로 나아가서 기쁘게 맞이하면 참으로 새로우면서 기쁩니다. 새로움과 기쁨을 생각해서 넉넉히 맞아들이니 말 그대로 새롭고 기쁩니다. 이와 달리, 틀에 박힌 어떤 일을 붙잡기만 하면, 이 틀에 박힌 대로 해내야 하니까 아무래도 몸이나 마음이 힘들면서 기운을 많이 쏟아야 합니다. 고단하면서 웃음도 없고 노래도 없어요.


  삶을 짓는 사람이 웃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삶짓기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삶을 지어야 삶짓기입니다. 웃음을 지어 웃음짓기입니다. 노래를 지어 노래짓기입니다. 글을 지어 글짓기입니다. 꿈을 지어 꿈짓기입니다. 사랑을 지어 사랑짓기입니다. 밥을 지어 밥짓기입니다. 집과 옷을 지으면 집짓기와 옷짓기입니다.


  우리는 먼먼 옛날부터 모든 삶을 손수 지었습니다. ‘삶짓기(현실 창조)’란 바로 내가 나답게 홀로서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는 기운찬 발걸음입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