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32 ‘배우다’와 ‘가르치다’
받아들여서 몸에 붙도록 할 때에 ‘배운다’고 합니다. 내가 아닌 남이 알도록 이끌 때에 ‘가르친다’고 합니다. ‘알도록 하’는 일만 놓고 ‘배우다’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면서 “몸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삭여서 내 것으로 삼는다”고 할 적에 비로소 ‘배우다’라는 낱말을 씁니다. ‘가르치다’라는 낱말도 이와 같아요. 사회나 학교에서는, 남이 무엇을 알도록 이끌 때에 으레 ‘가르치다’라 하지만, 내 둘레에 있는 남들이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삭여 이녁 것으로 삼”도록 이끌 때에 비로소 ‘가르치다’입니다. 내가 너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네가 이 이야기를 찬찬히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삭여 네 것으로 삼으면, 나는 너를 가르쳤다고 할 만하지만, 네가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삭이지도 않아서 네 것으로 안 삼거나 못 삼으면, 이때에는 가르쳤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때에는 그저 ‘말했다’고만 합니다.
학교에서는 어른이 ‘가르치’고 아이가 ‘배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가르치다·배우다’라는 낱말을 섣불리 쓸 수 없습니다. 교사 자리에 서는 어른은 그저 ‘말하’기만 합니다. 교사로서는 언제나 ‘말’을 들려줄 뿐입니다. 학생 자리에 서는 아이가 이 ‘말’을 귀여겨들으면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다음에 스스로 삭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가르치다·배우다’가 이루어집니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 비로소 가르칩니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으면, 더 많이 알건 모두 알건 아무도 못 가르칩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가르칠’ 사람을 부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배우려는 사람한테 걸맞’다 싶은 사람을 불러서 ‘가르쳐’ 줄 수 있도록 이끕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모두 ‘배우는 쪽’에서 일으키는 몸짓이요 삶입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처음에는 그저 ‘말’을 할 뿐이지만, 배우려는 사람이 기쁘게 받아들여서 삭이는 얼거리가 되면, 아하 그렇구나 ‘가르침’이란 이렇구나 하고 ‘배웁’니다. 다시 말하자면, 배우려는 사람은 ‘가르침’을 끌어내고, 가르치려는 사람은 ‘배움’을 끌어당깁니다. 배우는 사람은 늘 가르칠 수 있으며, 가르치는 사람은 늘 배울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슬기롭거나 철이 든 교사(어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늘 많이 배우’거나 ‘가르치는 동안 언제나 새롭게 배운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를 더 살펴야 합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을 주고받는 일은 가르침이나 배움이 아닙니다. 삶을 물려주고 물려받는 사랑이 바로 가르침이요 배움입니다. 지식은 퍼뜨릴 수 없습니다. 지식은 물려줄 수 없습니다. 오직 삶만 퍼뜨리고, 삶만 물려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 어떤 씨앗을 심고, 씨앗이 어느 만큼 자랄 적에 갈무리를 하느냐 하는 대목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은 ‘삶짓기’를 물려주고 물려받는 일입니다. 이는 지식이 아니고 철학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르침과 배움은 어떤 슬기를 물려주거나 물려받는 사람이 스스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끄는 이야기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몇째 서랍에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일은 ‘알리다’쯤 됩니다. 저녁에 텔레비전에서 어떤 방송이 흐른다고 말하는 일도 ‘알리다’쯤 됩니다. 신문에 나오는 사건이나 사고 같은 이야기도 그저 ‘알리다’일 뿐입니다. 내가 읽은 책에서 재미난 대목을 말할 때에도 그냥 ‘알리다’입니다.
가르치거나 배울 적에는 ‘말’을 빌기도 하지만, 아무 말이 없이 몸으로 가르치거나 배우기 일쑤요, 으레 마음으로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사랑으로 가르치거나 배우기도 하고, 믿음으로 가르치거나 배우기도 합니다. 삶을 물려주거나 물려받기에 가르침이면서 배움입니다. 삶을 다룰 때에 비로소 가르침이요 배움입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거의 모든 학교교육과 인문지식은 가르침이나 배움하고 크게 동떨어지거나 아예 끈조차 안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