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에세이집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0



눈을 밝히는 말과 글

― 9월이여 오라

 아룬다티 로이 글

 박혜영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2004.6.15.



  인도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인도라는 나라는 아시아에 있지 않습니다. 지구에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아시아가 아닌 지구에 있습니다. 미국도 러시아도 호주도 모두 지구라는 별에 있습니다.


  인도라는 나라가 아닌 ‘지구라는 별’에 ‘아룬다티 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뭇사람 눈길로 이녁은 ‘가시내(여성)’입니다. 그러나, 아룬다티 로이라는 사람은 ‘인도인’이나 ‘가시내’라는 허울로 살 마음이 없습니다. 오직 ‘지구사람’으로 살 뿐이고, 오로지 ‘사람’으로 삶을 노래할 뿐입니다.


  ‘지구사람 아룬다티 로이’는 딱 잘라서 말합니다. “왜 미국은 당장 전쟁을 중지해야 하는가?” 하고. 나도 아룬다티 로이라는 님과 함께 ‘지구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구별 한쪽에서 이녁 말을 받아서 새롭게 외칩니다. “왜 한국은 곧바로 군대를 없애고 전쟁을 멈추어야 하는가?”



..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폭격은 뉴욕과 워싱턴을 위한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민중에 대한 또 하나의 테러행위이다. 무고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가 뉴욕과 워싱턴에서 끔찍하게 죽은 희생자 수에 포함되어야 하며,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민중이 전쟁의 승리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고, 정부가 전쟁의 패배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민중은 죽임을 당한다 ..  (48쪽)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 못지않게 전쟁 미치광이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를 보셔요. 고구려가 드넓은 땅을 차지했다면서 노래합니다. 그래요, 고구려는 드넓은 땅을 차지했지요. 드넓은 땅을 차지하려고 이웃나라 사람을 끔찍하게 죽였지요. 그러고 나서, 이웃나라는 조금씩 힘을 키워 고구려한테 앙갚음을 했고, 고구려 이웃에 있는 백제와 신라와 가야한테도 앙갚음을 했으며, 먼먼 뒷날에 고려와 조선한테도 앙갚음을 해요.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전쟁 미치광이한테는 전쟁 미치광이가 찾아오는걸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바다 건너 일본이라는 나라를 얕잡거나 깔보았으며, 흔히 ‘대마도 정벌’이니 무어니 하면서 군대를 보내어 다스렸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은 ‘대마도 정벌’ 따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주 마땅히 ‘너희보다 군대 힘을 더 키워서 너희가 우리한테 했듯이 짓밟을 테야!’ 하고 외칩니다.


  군대는 군대를 끌어들입니다. 전쟁은 전쟁을 끌어들입니다. 군사독재는 군사독재를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평화와 어깨동무를 합니다. 사랑은 사랑과 손을 잡습니다. 꿈은 꿈과 이어져서 아름다운 무지개로 피어납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는 이를 하나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전쟁무기와 군대가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는듯이 여기면서 이를 학교와 언론과 사회에서 가르치려 합니다. 군대와 경찰이 하는 일이란 언제나 전쟁일 뿐이지만, 이를 제대로 마주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 군대에서 젊은이가 서로 다치면서 거친 말을 일삼다가 목숨까지 잃을까요? 왜 군대에서 젊은이가 미쳐 버리고, 총질을 해대며 따돌림과 괴롭힘이 널리 퍼졌을까요? 왜 군대에서는 갖가지 부정부패와 비리가 끊이지 않을까요? 전쟁무기와 군대는 언제나 이웃을 해코지하면서 제 밥그릇을 채우려는 바보짓이기 때문입니다.



.. 실제로 그들(미군)은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받았지만 보호하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던 겁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분명한 거지요 … 미국 할렘의 가난뱅이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약탈한다면 그건 괜찮을까요? 그때도 똑같이 희희낙락하며 반길까요 ..  (136, 139쪽)



  지구사람 아룬다티 로이 님이 쓴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2004)를 읽습니다. 조그마한 책을 찬찬히 읽습니다. 책은 조그맣습니다. 지구별에서 한 사람 몸집도 조그맣거든요. 그러나, 지구별은 바로 이 작은 씨앗에서 깨어났습니다. 작은 씨앗이 있기에 오늘날 같은 지구별이 됩니다.


  드넓은 숲은 처음부터 드넓은 숲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아주 작은 씨앗 한 톨이 이 땅에 깃들어 자라면서 풀이 되지요. 풀씨가 퍼져서 풀밭이 되어요. 풀밭에 나무씨가 떨어져 나무로 자랍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새로운 씨앗이 터져서 차츰 퍼지고, 이 씨앗은 더욱 퍼지고 퍼져서 드디어 숲이 됩니다.


  풀밭이 되거나 숲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는 지 여느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아주 까마득한 나날이 흐를 테니까요. 고작 백 해쯤 사는 몸뚱이로는 숲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구를 알 수 없습니다.


  지구별에서 왜 수많은 정치조직과 사회조직은 전쟁을 일삼을까요? 기껏해야 백 해조차 못 살기 때문입니다. 언제 죽을는지 모르다 보니, 이 짧은 삶을 싸움질과 바보짓으로 흘려 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구별에서 즈믄 해를 살거나 만 해나 십만 해를 산다고 생각해 보셔요. 이때에도 싸움질을 할까요? 우리가 ‘밥’을 먹지 않고 ‘바람’만 마시면서도 몸이 튼튼하다면 굳이 싸움질을 할까요?



.. 인도정부가 핵무기에다가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어넣는 동안 그 무기로 지키려는 땅은 썩어가고 있다. 강이 죽고, 숲이 사라지고, 공기는 숨쉬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가고 있다. 내가 사는 도시 델리는 바로 내 눈앞에서 변해가고 있다. 자동차들은 더욱 미끈해지고, 담장은 더욱 높아지고, 늙고 병든 야경꾼들 대신에 젊은 무장 경비원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그러나 하수도, 철로 주변, 공터 같은 음습한 곳에는 어디서나 마치 이처럼 빈민들이 듫끓고 있다. 그 빈민들의 아이들은 산란한 마음으로 거리를 헤매고, 선글라스를 낀 특권층들은 그들을 외면한다 … 세계화란 오직 돈과 상품과 특허 서비스에 관한 것이지, 결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인권존중에 관한 것도, 인종차별이나 화학 및 핵무기, 또는 온실효과와 기후변화, 또는 정의에 관한 국제적 협약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5, 85쪽)



  삶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싸웁니다. 삶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괴롭힙니다. 삶을 살피지 못하기에 사랑을 등집니다. 삶을 깨달으려 하지 않으니 자꾸 다투면서 동무나 이웃을 밟고 올라서서 혼자 1등이 되려고 법석을 피웁니다.


  지구별 곳곳에서 돈 때문에 다투고, 석유와 물과 밥 때문에 다투는 까닭은 서로서로 바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바보이니 자꾸 전쟁무기를 만듭니다. 핵폭탄이 일본에 두 발 떨어졌지요. 그러면 일본만 잿더미가 되었을까요? 아니에요. 1945년 그무렵에 일본 가까이 있는 한국도 아주 마땅히 ‘핵폭탄 피해’를 받지요. 몇 해 앞서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진 일을 놓고 ‘일본 것은 못 먹’고 ‘일본에 가지 말자’는 말이 불거집니다만, 1945년 그무렵에는 어떠할까요? 바람을 타고 바닷물이 흐르니, 한국 동해와 남해와 서해에는 아주 마땅히 ‘방사능 물질’이 넘쳤을 테며, 한국 하늘을 방사능 먼지가 뒤덮었을 테지요.


  중국에 지은 공장이 내뿜는 매연과 폐수가 한국을 거쳐 일본을 지나 태평양을 가로지른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이 지구별이 왜 동그란 모습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쓰레기를 내놓으면, 이 쓰레기는 끝끝내 나한테 돌아옵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이 사랑은 언제나 내 곁을 맴돌면서 따사로운 기운이 됩니다.



..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들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 가난한 자들의 이름으로 생산되는 전력(전기)은 끝없이 탐욕적인 부유한 자들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 … 다행스럽게도 나는 선거에 출마할 사람이 아니다. 나는 국가가 아니라 강과 계곡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  (5, 9, 20쪽)



  지구별에서 일으키는 전쟁은 바로 내가 나를 죽이는 짓입니다. 지구별에서 자꾸 만드는 전쟁무기와 군대는 바로 내가 나를 괴롭히는 짓입니다. 입시지옥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나를 모질게 짓밟는 짓입니다. 입시지옥일 뿐인 초·중·고등학교에 그냥저냥 아이들을 집어넣는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이녁 삶을 짓누르는 셈입니다.


  삶을 가르치는 배움터가 아니라면, 어버이 스스로 새로운 배움터를 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맹자 어머니가 왜 보금자리를 여러 차례 옮겼을까요? 스스로 배움터와 삶터를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학군이나 학벌 때문에 옮기는 집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삶을 지을 만한 터전으로 옮기거나, 우리가 머문 이곳을 아름답게 새로 가꾸어야 합니다.


  대통령이나 교육부장관이나 국무총리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이 수없이 바뀐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달라져야 삶이 달라집니다. 내가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게 짓고, 우리 아이들을 내가 손수 사랑으로 가르칠 수 있을 때에 이 지구별이 다시 태어납니다.



.. 우리가 계속 살아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계속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너무도 쉽게 포기해 버린 정치적 투쟁을 다시 우리의 것으로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 지점에서 현실을 외면해 버린다면, 우리의 예술은 별로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될지 모른다 … 너무 많이 생산하는 농민도 절망 속에 빠져 있고, 너무 적게 생산하는 농민도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  (18∼19, 32쪽)



  지구사람 아룬다티 로이 님이 들려주는 말은 아주 쉽고 또렷합니다. 미국을 손가락질하지 말고, 나부터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라고 말합니다. 텔레비전으로 ‘전쟁 현장중계’를 구경하지 말고, 텔레비전을 끈 뒤 내 보금자리를 사랑으로 지으라고 말합니다.


  아주 쉬워요. 누구나 이렇게 하면 됩니다. 쳇바퀴 도는 삶은 이제 그쳐야 합니다. 굴레에 스스로 갇힌 삶에서 스스로 나와야 합니다. ‘남(전문가)’한테 맡기는 교육이나 문화가 아니라, ‘내’가 내 삶터에서 우리 아이와 함께 삶을 지어야 합니다.



.. 지금은 ‘전문가’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다시 낚아채 와야 할 때입니다. 공적 문제를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언어로 질문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또한 일상적인 언어로 하라고 요구할 때입니다 ..  (38쪽)



  씨앗을 심는 사람은 ‘농사 전문가’가 아닙니다. 씨앗을 심는 사람은 ‘그저 사람’입니다. 사람으로서 삶을 지으려 하기에 씨앗을 심습니다. 어버이가 왜 바느질을 할까요? 옷 짓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바느질을 하지 않아요. 사랑을 실어 아이한테 옷을 주고 싶어서 바느질을 합니다. 어버이가 왜 밥을 할까요? 밥 짓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밥을 하지 않아요. 꿈을 담아 아이와 한 그릇을 기쁘게 나누고 싶기에 밥을 합니다.


  우리가 읽을 책은 ‘눈을 밝힐 책’입니다. 눈을 밝힐 책을 읽은 뒤에는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내 삶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고 나서 움직여야지요. 손수 삶을 지어야지요. 그러면 됩니다. 내 삶이 나한테 오도록 내 목소리를 내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4337.8.2.달/4348.2.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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