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몸이란


  우리 집 큰아이와 곁님 동생(나한테는 처남)한테 참으로 모질고 끔찍한 일이 터졌다. 이 일을 추스르는 동안 나는 아주 모질면서 끔찍하게 앓는다. 나흘에 걸쳐 밥 한 술과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못하고, 섣불리 밥 한 술이나 물 한 방울 댔다가 속이 제대로 얹히며, 속에 넣은 밥이 없는데에도 두세 시간에 한 차례씩 물똥을 꽤 누는 나날이었다. 오늘은 똥구멍이 너무 아파서 두세 시간마다 치를 볼일을 겨우 버텨서 서너 시간이나 너덧 시간에 보기도 했지만, 고되며 힘들기는 참 고되며 힘들다.

  그렇다고, 늘 하던 대로 ‘아이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놀리고 재우고’ 하던 일을 미루거나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못한다. 모두 스스로 해야 한다.

  이를 악물면서 버티지는 않았다.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견디지는 않았다. 아파서 말이 안 나온다는 얘기를 온몸으로 느꼈고, 아플 적에 힘겨이 말을 쥐어짜내는 사람이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오롯이 깨달았다. 내가 열 살 안팎이던 때이지 싶은데, 똥을 못 가리고 드러누운 할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나와 형과 어머니)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셨다고 떠올린다. 내가 많이 어려서 잘못 떠올릴는지 모른다. 형은 나보다 세 살 위인 만큼 제대로 떠올릴 수 있으리라. 아무튼, 몸져누운 할아버지는 말이 아주 드물었고 어쩌다 말문을 열 적에 참으로 부드러웠다. 이때 나는 한 가지가 궁금했다. ‘아니, 아픈 할아버지가 어떻게 얼굴도 안 찡그리고 말을 이렇게 부드럽게 할 수 있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놀리는 틈틈이 몸져누워 끙끙거리다가 아이들을 부른다든지, 밤에 아이들을 재우며 자장노래를 부른다든지 하면서, 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목소리는 참으로 부드러웠다. 아마 지난 일곱 해를 돌이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였구나 싶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아이들과 주고받을 목소리요, 이 목소리로 곁님과 다른 이웃 모두를 마주할 삶을 열겠구나 하고 느꼈다.

  그런데, 나흘이 지나 닷새로 접어들려는 무렵에 살몃살몃 ‘옛 목소리’가 불거지려고 한다. 옛 목소리가 몇 마디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이내 ‘새 목소리’에 눌려서 사라진다. 나 스스로 내 ‘옛 목소리’와 ‘새 목소리’를 느끼면서 빙긋 웃는다. 무엇보다, 요 나흘 사이에 내가 아이한테 들려준 목소리는 바로 내가 ‘열일곱 살’까지 지키던 목소리였다고 불현듯이 알아챈다. 나는 내 ‘마음 시계’를 그동안 열일곱 살이라는 나이에 멈추어 놓고 살았구나 싶다.

  두세 시간마다 똥구멍이 아프도록 물똥을 눌 적에 ‘내가 아프게 한 이웃’이 누구였을까 하고 마음에 그린다. 자리에 드러누워 등허리를 펴고 세 가지만 마음에 그렸다. 첫째, 옳게, 둘째, 바르게, 셋째, 아름답게.

  옳게 가고 바르게 가야지, 그런데 아름답게 가야지. 아름답지 않다면 옳지도 바르지도 않아.

  나는 다시 깨어나려고 한다. 몸살을 기쁘게 맞아들이면서 다시 일어나려고 한다. 묵은 똥을 내보내어 새로운 몸이 되려고 한다. 헌 몸이 1차원에 있든 2차원에 있든 3차원에 있든 대수롭지 않다. 3차원에 있어도 1차원보다 높지 않다. 3차원에 있는 몸은 곧 1차원으로 떨어지고, 1차원에 있는 몸은 이윽고 3차원으로 올라올 수 있지만, 다시 1차원으로 돌아간다. 4차원을 지나 5차원과 6차원을 그릴 수 없다면, 이리하여 7차원으로 옷을 벗을 수 없다면, 1차원과 2차원과 3차원 사이에서 맴돌이를 하는 몸은 무엇이 될까. 도토리 키재기를 할 삶이나 몸이나 지식이 아니라, 깨어나야 할 삶이나 몸이나 지식이다.

  내 마음속에 먼먼 옛날부터 깃들어 오래도록 잠든 넋을 깨우려고 비로소 한 꺼풀을 벗는다. 아니, 예전에도 수없이 많은 꺼풀을 벗었으니, 아직 나한테 남은 꺼풀을 한 번 더 벗은 셈이다. 꺼풀은 벗을 만큼 앞으로 더 벗으리라 본다. 그리고, 굳이 꺼풀을 벗기보다 ‘홀가분한 넋과 얼’이 된다면, 어떤 꺼풀을 뒤집어쓴 몸이라 하더라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을 만하리라 느낀다. 아직 내가 걸을 길은 ‘꺼풀 벗기’이니, 꺼풀부터 제대로 벗자고 생각을 모은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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