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와 ‘책값 읽기’
도서정가제라는 제도가 모든 것을 이루어 줄 수 없다고 느낀다. 다만, 도서정가제는 적어도 한 가지 일은 할 수 있다. 큰 출판사와 사재기 출판사가 ‘베스트셀러 장난질’을 하려고 ‘책값 장난 치기’를 하려는 짓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
나는 예전에 혼자 살면서 출판사 일꾼으로 있을 적에 ‘한 해에 책값 천만 원 쓰기’를 곧잘 했다. 시골에서 네 식구가 살아가는 요즈음은 이렇게 못 한다. 그러나, 예전이나 이제나 똑같이 하는 일은 하나 있다. 책을 장만할 적에는 오직 책만 본다. 책을 장만할 적에는 책값을 보지 않는다.
책을 보는 사람은 언제나 책을 본다. 책값을 보는 사람은 언제나 책값을 본다.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책을 읽는다. 베스트셀러를 읽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베스트셀러를 읽는다. 이야기를 만나려는 사람은 언제나 이야기를 만난다. 유명 작가를 만나려는 사람은 언제나 유명 작가를 만난다.
책값을 보거나 베스트셀러를 보거나 유명 작가를 보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저 그럴 뿐이다. 책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책을 만나는 일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다만 그러할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가려는 길을 간다. 이 길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그저 이러한 길일 뿐이다. 이를테면, 요즘 사회에서 진보로 갈 수 있고 보수로 갈 수 있다. 진보로 가기에 늘 아름답지 않고 보수로 가기에 늘 안 아름답지 않다. 진보로 가지만 검은 꿍꿍이를 품기에 이웃을 등치는 사람이 있다. 보수로 가지만 맑은 마음이 되기에 이웃을 보살피는 사람이 있다. 공무원이 되면서 아름다운 정책을 펴는 사람이 있고 공무원이 되면서 쇠밥그릇을 붙잡는 사람이 있다. 신문기자가 되면서 끔찍한 비틀기를 일삼는 사람이 있고 신문기자가 되면서 곧은 붓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을 한대서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르지 않다. 어떤 일을 한다면 그예 어떤 일을 할 뿐이다. 어느 곳에 서든, 어떤 일을 하든, 어떤 길을 걷든, 스스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름이 그리 안 알려진 사람이 쓴 알찬 책을 읽는다고 해서 더 훌륭하지 않고, 이름을 팔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쓴 허울좋은 베스트셀러를 읽는다고 해서 바보스럽지 않다.
‘책값 읽기’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책값을 읽기에, ‘읽을 책’을 살피는 눈길보다는 ‘더 값싸다 싶은 책’을 살피는 눈길이 되기 쉽다. ‘즐겁게 읽을 아름다운 책’이라 하더라도 ‘값이 세다’고 여겨 끝끝내 이 책은 손에 쥘 생각을 못 하기 쉽다.
‘책읽기’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책을 읽기에, ‘내가 읽을 책’이 값이 높다면 ‘높은 책값을 장만하는 길’을 생각한다. 꾸준히 돈을 벌고 모아서 ‘내가 읽을 책’을 끝끝내 장만하고야 만다.
값이 싸거나 에누리를 많이 하는 책을 읽기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못 누리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을 살뜰히 가눈다면 어떤 책을 손에 쥐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린다. 그저 ‘값이 싼 책’이나 ‘에누리를 많이 하는 책’을 살피면서 장만한다면. ‘이야기’가 아닌 ‘값’에 휘둘리기 쉬울 뿐이다.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려 하는 사람은 반드시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려 한다고 느낀다. ‘책값’이 아니라 ‘책’을 보려는 사람이 틀림없이 많다고 느낀다. 고마운 이웃님이요 책동무는 우리 둘레에 아주 많다고 느낀다. 이들이 있어 책마을이 살아나고, 이들이 있기에 책지기는 새로운 책을 씩씩하게 엮어서 내놓을 수 있다. 4347.11.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