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눈빛 98. 노란 빛물결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찾아올 무렵부터 처마 밑은 조용합니다. 여름이 저물 무렵 처마 밑 새끼 제비는 날갯짓을 익혀 둥지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새끼 제비와 어미 제비는 한동안 처마 밑 둥지에서 잡니다. 보름에서 한 달 사이는 이른아침에 둥지를 떠난 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고개 너머로 꼴깍 넘어갈 때에 돌아오지만, 날갯짓을 잘 익혀 몸에 힘이 붙은 새끼 제비들은 한 달 즈음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숲이나 들에서 다른 동무를 사귀었을는지 모르고, 먼먼 고장까지 날아가서 새로운 이웃을 만났을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제비는 무리를 지어 첫가을에 태평양을 가로지릅니다.
처마 밑에서 하루 내내 듣던 제비 노랫소리가 사그라들 무렵부터 들빛은 푸른 물결에서 누런 물결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푸른 빛깔과 누런 빛깔이 살살 어우러지고, 나중에는 온통 샛노란 물결이 됩니다. 이러한 물결을 어쩌다 한 번 가을날 시골에 와서 바라보는 사람은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며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빛물결’을 늘 보는 사람도 깜짝 놀라요. 하루하루 아주 다르거든요.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모레가 달라요.
아주 눈부시다 싶은 노란 빛물결일 적에 벼를 벱니다. 그래서, 아주 눈부시다 싶은 노란 빛물결을 볼 수 있는 때는 고작 하루나 이틀입니다. 도시에서 살며 시골을 살짝 지나가다가 들녘 노란 빛물결을 만났다면 한 해 가운데 하루나 이틀 동안 볼 수 있는 놀라운 들빛을 만난 셈입니다.
《굴피집》이라는 사진책을 선보인 적이 있는 안승일 님은 ‘노란 빛물결’이 출렁이는 강원도 멧골자락 굴피집 마을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자그마치 열 해 동안 가을마실을 했다지요. 해마다 가을빛을 찍기는 하지만 ‘어딘가 아쉽다’고 느껴 이듬해에 다시 찍고, 다음해에 또 찍고 하다가, 열 해째에 이르러 비로소 ‘그래, 바로 이 빛물결이로구나’ 하고 느껴서 사진 한 장 얻을 수 있었다고 해요.
가만히 보면, 가을날 노란 빛물결만 ‘한 해 가운데 하루나 이틀’이 아닙니다. 새봄에 돋는 풀잔치도 한 해 가운데 며칠이 안 됩니다. 겨우내 시든 풀빛과 봄에 돋는 풀빛이 어우러지는 빛잔치도 한 해 가운데 며칠이 안 됩니다. 지난날에는 새봄에 김이 폴폴 올라오는 논흙이나 밭흙 모습도 한 해 가운데 며칠 동안 볼 수 있었어요. 한 해 가운데 무지개를 볼 수 있는 날은 며칠이나 될까요? 능금꽃이 하얗게 터져서 하얀잔치를 이루는 날은, 벚꽃잔치나 살구꽃잔치나 포도꽃잔치나 배꽃잔치를 이루는 날은, 참말 한 해 가운데 며칠이나 될까요?
하나하나 따지면, 우리가 누리는 삼백예순닷새는 날마다 새로운 ‘빛잔치’입니다. 오늘은 오늘 하루만 볼 수 있는 빛잔치가 우리 둘레에 있습니다. 어제는 어제 하루만 볼 수 있던 빛잔치가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오늘 이녁은 어떤 빛잔치를 마주하면서 하루를 여는가요? 4347.11.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우리 집 대문 앞 마을논 노란 빛물결은
이 사진을 찍은 이튿날 사라졌습니다 ^^;
참말 노란 빛물결은... 와 예쁘다 하고 생각하면
곧 사라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