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딩과 수평선
요시 마사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17



오늘도 즐겁게 살아

― 푸딩과 수평선

 요시 마사코 글·그림

 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4.11.15.



  늦가을이지만 따스한 비가 내리는 십일월 막바지입니다. 아침에 흩뿌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마당으로 나와서 비로 가랑잎을 씁니다. 후박나무는 늦여름이 끝날 무렵 가랑잎을 잔뜩 내놓고 이제는 더 가랑잎을 내놓지 않습니다. 초피나무는 겨울을 코앞에 둔 이즈음에 비로소 잎이 며칠 사이에 샛노랗게 바뀌면서 늦가을 비를 맞으면서 가랑잎을 우수수 내놓습니다.


  초피잎을 쓸어서 초피나무 둘레에 뿌립니다. 어느 나무이든 나무가 스스로 내놓는 가랑잎이 나무를 살리는 가장 살뜰한 거름이 됩니다. 어느 나무이든 사람이 거름을 주거나 비료를 뿌려야 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스스로 잎을 틔우고 떨구면서 새롭게 기운을 얻습니다. 잎사귀는 햇볕과 바람을 듬뿍 머금으면서 나무를 살찌우고, 나무를 한껏 살찌운 뒤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을 빚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숲은 비가 아무리 내리고 내려도 흙이 줄지 않아요. 나뭇잎이 새로운 흙이 될 뿐 아니라, 나무뿌리와 풀뿌리가 ‘새로운 흙을 단단히 움켜쥐’기 때문입니다.



- “모르겠어. 난 너를 좋아했고, 지금도 싫어하지 않아. 하지만 그때, 그때만은 도저히. 나에겐 엄마밖에 없어. 부모님과 형제가 모두 있는 코우타하고는 달라.” (27쪽)

- “보여주고 싶었어. 하루 빨리 엄마에게 손주의 얼굴을. 그게 나의 꿈이었거든.” (34쪽)

- ‘오늘 밤은 보름달.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둥근 달이 웃고 있다.’ (145쪽)




  초피잎을 쓸고 난 뒤에는 돌울타리를 다시 쌓습니다. 이웃밭 사람이 자꾸 넘나들면서 무너지기도 했고, 마을고양이가 돌울타리를 타고 지나가다고 곧잘 허물기도 합니다. 이웃밭 사람이 넘나들지 못하도록 높이 쌓고, 마을고양이가 돌울타리 말고 다른 길로 다니기를 바라면서 단단히 쌓습니다.


  돌울타리를 쌓으며 돌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돌 하나하나는 그리 안 무겁습니다. 고양이 발걸음에도 채여서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돌울타리는 비바람에 끄떡하지 않습니다. 비나 바람이 찾아들어도 야무집니다. 덩굴풀이나 이끼가 자라서 돌울타리를 덮습니다. 햇볕과 빗물을 머금은 돌은 아주 조금씩 바스라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자그마한 틈을 타고 이끼나 풀씨가 뿌리를 내려서 돌을 쪼개기도 합니다. 그러나 풀줄기와 넝쿨줄기는 돌울타리를 안팎으로 단단히 잡아 줍니다.


  사람은 돌로 울타리를 알맞게 쌓으면 됩니다. 사람은 나무를 심고 살가이 사랑하면 됩니다. 사람은 씨앗을 심고 살뜰히 보살피면 됩니다. 사람은 해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비와 바람을 노래로 맞이하면 됩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 ‘뭐야, 얼굴은 왜 빨개지고 난리람.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하늘이 높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52쪽)

- ‘키리가 언제나 어딘지 무심해 보였던 건 그 때문이었을까? 코스모스와 산과 강이 키리가 좋아하는 세계였구나.’ (65쪽)

- ‘사랑이 되지 않았던 사랑. 그것조차도 나를 조금은 행복하게 해 준다.’ (73쪽)



  요시 마사코 님 만화책 《푸딩과 수평선》(대원씨아이,2014)을 읽습니다. 푸딩이랑 수평선이 서로 어떻게 잇닿기에 두 가지를 만화책 이름으로 삼았을까요. 짧은만화를 여럿 담은 《푸딩과 수평성》에 깃든 첫 이야기에서 이 실마리가 드러납니다. ‘푸딩과 수평선’은 푸딩을 먹으면서 바라보는 수평선입니다. 또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먹는 푸딩입니다.


  일본은 어디를 가나 바다가 가깝습니다. 일본은 섬나라라고 하니까요. 한국은 섬나라는 아니지만 바다가 퍽 가깝습니다. 이리 가도 바다요 저리 가도 바다입니다. 다만, 한국은 일본처럼 너른 바다를 헤아리거나 바라보기는 쉽지 않으리라 느껴요. 수평선이라면 서쪽도 동쪽도 남쪽도 수평선이 멀고 멀지만, 일본은 훨씬 먼 데까지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먼 바다를 헤아리겠지요.


  아련하다 싶은 꿈을 생각합니다. 아득하다 싶은 앞날을 그립니다. 아스라이 떠오르는 사랑을 헤아립니다.



- “부모님은 성격이 너무 안 맞아서,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아버지 험담을 했지만, 난 아버지가 좋았어요. 아버진 항상 나를 챙겼어요. 말주변은 없지만 나하고 대화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고요.” (99쪽)

- ‘깨끗한 피부. 귀여운 점. 네 안에 내가 있다. 그무렵 확실히 사랑을 했던 내가.’ (105쪽)

- “만약의 경우에는 만화를 버릴게. 약속해.” “그런 말 하지 마. 난 슈우지가 만화를 계속 그렸으면 좋겠어.” (175쪽)




  밥 한 그릇을 지어 아이들과 먹습니다. 밥 한 그릇을 지어서 차릴 적마다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맞이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밥을 짓는 동안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면서 가끔 노래를 부릅니다. 밥상에 그릇을 올리는 동안 조용히 마음을 가누면서 곧잘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설거지를 할 적에도, 부엌일을 다 끝내고 젖은 행주를 말릴 적에도, 기지개를 켜고 등허리를 톡톡 두들길 적에도, 등허리를 펴야겠구나 싶어서 방바닥에 엎드리거나 누워서 끙끙거릴 적에도, 오늘 하루는 새롭게 즐겁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푸딩과 수평선》에 나오는 젊은 사내와 가시내는 아주 대단한 사랑을 바라지 않습니다. 연속극이나 영화에서 볼 법한 사랑을 바라지 않습니다. 더 많은 돈이나 더 큰 이름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직 한 가지를 바랍니다. 스스로 키우던 꿈을 함께 가꿀 수 있는 곁님을 바랍니다. 밥 한 그릇을 함께 나누면서 웃고 노래할 짝꿍을 바랍니다. 삶을 사랑으로 채워서, 꿈을 이야기꽃으로 피울 수 있는 나날을 바랍니다. 4347.11.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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