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손길
네 손길을 타면서 책이 빙긋 웃는다. 즐겁게 웃으면서 들여다보니 책이 너를 보며 웃는다. 내 손길을 타면서 책이 싱긋 웃는다. 기쁘게 웃으면서 들여다보니 책이 나를 보며 웃는다.
아직 손길을 타지 않은 책은 뻣뻣하다. 아직 손길을 못 탄 책은 빳빳하다. 손길을 한 번 탄 책은 부드럽다. 손길을 두 번 탄 책은 보드랍다. 손길을 세 번 탄 책은 살갑다. 손길을 네 번 탄 책은 사랑스럽다.
내 손길을 탄 책을 아이들이 물려받아 읽는다. 아이들 손길을 탄 책을 나중에 새로운 아이들이 물려받아 읽는다. 책 한 권은 한 사람한테만 읽히지 않는다. 여러 사람한테 두루 읽히려고 빚는 책이다. 기나긴 해에 걸쳐 꾸준하게 읽히려고 빚는 책이다.
나무 한 그루는 즈믄 해를 너끈히 산다. 책 한 권이 즈믄 해를 가기는 쉽지 않으나, 책에 깃든 이야기는 즈믄 해를 너끈히 흐를 수 있도록 엮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자면, 즈믄 해를 살아낼 만한 이야기일 때에 책에 담아서 나눌 만하다.
한두 해가 흐른 뒤에는 잊히는 이야기라면, 열 해쯤 지난 뒤에는 찾는 손길이 없는 이야기라면, 백 해쯤 뒤에는 들여다볼 값어치를 못 느끼는 이야기라면, 즈믄 해쯤 뒤에는 아무도 떠올리지 못할 이야기라면, 이러한 이야기는 책으로 찍혀 나와도 우리 가슴에 남지 못한다. 앞으로 즈믄 해를 흐를 이야기를 담은 책이 아니라 한다면, 오늘 이 나라에서 아무리 많이 팔리는 책이라 하더라도 어떤 꿈이나 사랑도 끌어내지 못한다. 이를테면, 교과서나 문제집이 얼마나 많이 팔리는가. 그런데, 이런 교과서나 문제집은 사람들 가슴에 얼마나 남을까. 고작 열 해 뒤만 보더라도 교과서나 문제집이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너무 많은 아이와 어른이 교과서와 문제집에 얽매인다. 책다운 책을 손에 쥐지 못한다. 책다운 책을 사귀지 못한다. 입시와 대학교와 학벌과 도시 문명과 돈벌이에 얽매여 그만 교과서와 문제집에 사로잡히고 만다.
책을 읽는 손길이 삶을 가꾸는 손길로 흐른다. 책을 아끼는 손길이 이웃을 사랑하는 손길로 흐른다. 책을 엮어 아이한테 물려주는 손길이 보금자리와 마을을 아름답게 보듬는 손길로 거듭난다. 오늘 이곳에 책 한 권이 있다. 4347.11.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