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피나무 초피알은 붉게
열매가 익는 흐름을 지켜본다. 여러 해 물끄러미 지켜본다. 마당 한켠에 나무가 있으니 날마다 새삼스레 들여다보고, 날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열매란 얼마나 천천히 단단하면서 야무지게 익는가 하고 헤아린다.
하루아침에 반짝 익는 열매는 없다. 감도 무화과도 여러 날 지긋이 기다린다. 아니, 여러 날이 아니라 한 달을 기다리고 달포를 기다린다. 처음 알이 맺힌 뒤 푸른 빛깔이 가시고 붉은 빛이 감돌기까지 한참 기다린다. 이동안 우리는 입이 아닌 눈으로 열매를 먹는다. 손이 닿으면 살며시 쓰다듬고, 손이 안 닿으면 나무 둘레에 서서 눈을 감은 뒤에 코로 냄새를 맡는다.
감나무 곁에 서서 감알 냄새를 맡는다. 모과나무 곁에 서서 모과알 냄새를 맡는다. 초피나무 곁에 서서 초피알 냄새를 맡는다. 나무마다 냄새가 다르고, 열매마다 냄새가 새롭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