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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지의 선물 ㅣ 다산어린이 그림책
이치카와 사토미 글.그림, 정숙경 옮김 / 다산어린이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36
우리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지
― 벤지의 선물
이치카와 사토미 글·그림
남주현 옮김
두산동아 펴냄, 1996.10.29.
가을이 무르익어 구월이 천천히 기웁니다. 시골집 처마에 깃들면서 새끼를 낳은 제비는 어느덧 거의 다 태평양을 가로질러 따뜻한 새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아직 돌아가지 않은 제비도 있어요. 아마 새끼를 두 차례 낳았나 봐요. 새끼를 한 차례만 낳은 어미 제비와 다 자란 새끼 제비는 일찌감치 돌아갔지만, 다시 새끼를 낳은 어미 제비는 늦둥이를 돌보면서 날갯짓을 가르치느라 바쁘리라 생각해요.
시골마을마다 들판이 누렇게 달라집니다. 누런 빛깔이 짙을수록 나락이 익는다는 뜻입니다. 참새는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아 부산을 떱니다. 추운 겨울이 닥치면 아무래도 넉넉히 먹어야 할 테니까요.
느즈막하게 깨어난 나비는 가을춤을 춥니다. 겨울나기를 하는 나비라면 큰나무 밑에서 가랑잎 품으로 깃들어 천천히 쉬리라 생각해요. 풀벌레도 이렇게 겨울을 맞이하려 하겠지요. 여름 내내 푸른 빛깔이던 풀벌레는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몸빛이 흙빛으로 바뀝니다. 여름 동안 나무에 푸른 빛깔로 달렸던 잎사귀는 어느새 누렇게 말라서 톡 떨어집니다. 나무가 선 자리마다 누런 가랑잎이 수북하게 쌓입니다.
.. 어느 여름날, 노라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초대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노라는 강아지 키키, 인형 마기와 곰인형 푸에게 큰 소리로 편지를 읽어 주었습니다. “놀러 오세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준비했습니다. 정원도 넓고, 수영장도 있습니다. 틀림없이 즐거운 시간이 될 거예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의 거위로부터.” .. (2쪽)
우리 집 뒤꼍에서 무화과알을 땁니다. 올해에는 무화과 몇 그루를 잘 건사했기에 무화과알을 제법 얻습니다. 달디단 무화과알은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 몰라요. 무화과나무가 우리한테 베푸는 고운 가을 선물입니다.
감나무도 우리한테 선물을 베풉니다. 모과나무도 선물을 베풀고, 나무란 나무마다 서로 다른 선물을 우리한테 나누어 줍니다. 가만히 보면, 나무는 열매만 선물하지 않아요. 한 해 내내 푸른 바람을 선물합니다. 싱그럽게 숨을 쉬고 맑게 꿈을 꾸도록 푸른 바람을 선물하는 나무입니다.
여름에는 짙푸른 그늘을 선물하지요.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을 막아 주지요. 참말 나무 몇 그루 집 둘레에 우람하게 서면, 이 집에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숨결이 가득가득 맴돕니다.
예부터 집집마다 나무를 심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아이를 낳는 집이면 으레 ‘우리 집 나무’를 심어요. 아이 이름을 따서 나무를 심습니다. 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어 사랑스러운 짝을 만나 새롭게 아이를 낳으면, 또 새롭게 이름을 붙여 나무를 심어요.
.. “이런! 누가 선물로 가지고 온 들꽃에 얼굴을 파묻고 있지?” “이웃에 사는 벤지예요. 아, 그렇지. 벤지도 와서 우리와 놀자.” 거위는 벤지도 초대했습니다 .. (6쪽)
아이와 살아가는 어른은 나무를 심습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나무를 선물합니다. 아이는 어른한테 무엇을 선물할까요? 글쎄,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무엇을 선물하지요?
아마, 가장 큰 선물이라면 웃음입니다. 웃음과 함께 노래를 선물합니다. 웃음과 노래가 어우러진 이야기를 선물합니다. 웃음과 노래가 어우러진 이야기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늘 언제 어디에서나 어른들한테 사랑을 선물하는 셈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나무와 밥과 옷과 집이라 하는 선물에 사랑을 담고, 아이들은 웃음과 노래와 이야기라는 선물에 사랑을 싣습니다.
.. 차를 마신 뒤에는 마당에서 신나는 나무타기놀이 .. (16쪽)
이치카와 사토미 님 그림책 《벤지의 선물》(두산동아,1996)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이치카와 사토미 님은 이 그림책을 1990년에 처음 선보였다고 하니, 제법 나이를 먹은 그림책입니다. 부드러우면서 포근한 붓질이 따사로운 그림책인데, 이 책에 서린 이야기도 부드러우면서 포근해요.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 ‘노라’는 숲 속 거위한테서 편지를 한 통 받는다고 해요. 네, 거위한테서 편지를 받습니다. 노라는 제 동무인 인형들한테 편지를 읽어 준다고 하는군요. 네, 인형들한테 편지를 읽어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노라’라고 하는 아이는 거위랑 인형하고 말을 섞을 줄 압니다. 거위랑 인형은 노라라는 아이하고 말을 섞고 싶습니다. 함께 놀면 즐겁고, 서로 아끼면서 사랑스럽습니다.
.. 낮잠을 잘 때에 벤지는 푹신푹신한 베개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친구에게 도움이 되어서 기쁜가 봐요 .. (25쪽)
참말 아이들은 거위나 양이나 인형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비디오나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잠자리나 제비나 매미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지식이나 저런 정보를 머릿속에 채우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구름이나 해나 별하고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열면 우리는 누구하고나 동무가 됩니다. 마음을 열 때에 우리는 서로서로 믿고 아끼는 동무가 됩니다. 마음을 여는 동안 어느새 내 사랑이 너한테 가고 네 사랑이 나한테 옵니다.
.. “어, 이게 그 뚱뚱했던 벤지야?” “전혀 뚱뚱하지 않잖아!” 이번에는 노라와 그 친구들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무슨 일이든 벤지 탓으로만 돌려 왔으니까요 .. (29쪽)
온몸을 가득 덮은 털로 뚱뚱해 보이던 양은 노라한테 선물을 하나 줍니다. 양은 이름이 ‘벤지’입니다. 양 벤지는 거위랑 인형이랑 노라한테 선물을 가득 받았어요. 맛난 밥이나 꽃만 선물이 아니에요. 서로 아끼고 보듬는 따사로운 사랑을 선물로 받았어요. 그래서, 벤지는 제 털로 지은 폭신하고 따스한 털옷 한 벌을 선물로 보내지요. 아주 마땅합니다만, 삐뚤빼뚤이어도 손수 편지를 곁들여서 소포꾸러미를 선물로 보내요.
마음을 열어 사귀는 사이라면 늘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어버이와 아이는 늘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동무와 동무도 서로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하늘과 땅도 서로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별들도 서로서로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우리는 지구별하고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고, 해님이나 달님하고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어요. 들꽃 한 송이하고도 선물을 주고받으며, 우람한 나무 한 그루하고도 애틋하게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 무엇을 선물로 주고받으면 즐거울까요? 우리, 다 함께, 무엇을 선물로 나눌 적에 아름답게 웃으면서 노래를 부를 만할까요?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