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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는다 ㅣ 창비시선 26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평점 :
시를 말하는 시 67
시와 배꽃
― 나는, 웃는다
유홍준 글
창비 펴냄, 2006.10.20.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아요. 시외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는 덜컹거리면서 바큇소리가 꽤 큽니다. 그러나,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 동무랑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 바큇소리를 하나도 못 느낄 뿐 아니라 아예 못 듣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 책을 읽으면, 내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모두 잊습니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적에는 동무하고 이야기를 못 나눕니다. 자꾸만 ‘아이 시끄러워’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니 책을 못 읽어요. 자꾸만 ‘시끄러워 죽겠네’ 하고 생각합니다.
.. 소음은 나의 노래 / 소음은 나의 자장가 / 소음 없이 난 이제 하루도 못 살아 .. (소음은, 나의 노래)
조용한 숲에 있어야 마음이 따사롭지 않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따사롭게 가눌 적에 마음이 따사롭습니다. 텔레비전이 없고 시끄러운 소리를 모두 막은 넓은 아파트에 있기에 명상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따사롭게 가누기에, 감옥 좁은 방에 갇혔어도 명상을 합니다. 절집에 찾아가야 비손을 올릴 수 있지 않아요.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빨래하면서 얼마든지 비손을 올릴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나를 건드리는 것’이 없는 데에 있을 때에 시를 쓰지 않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시를 씁니다. 돈이 있어야 책을 사서 읽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어야 책을 사서 읽습니다. 일에 치이지 않거나 바쁘지 않거나 돈도 넉넉히 갖춘 뒤에라야 책을 읽을 만하지 않습니다. 할 일이 많거나 바쁘거나 돈이 얼마 없어도, 스스로 마음을 열면 얼마든지 책을 읽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도 되고, 헌책방에서 값이 눅은 책을 찾아서 장만한 뒤 읽어도 돼요.
.. 휴일 없이 / 3교대 종이공장 제지공들은 출근을 한다 .. (문맹)
마음이 없는 사람은 겉모습에 끄달립니다. 같은 책을 놓고 ‘헌책’과 ‘새책’을 따질 까닭이 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해 봐요. 새책방에서조차 참 많은 사람들은 ‘더 깨끗한 책’을 살핍니다. 참 엉터리 같은 노릇입니다. 새책방에서도 이것저것 골라서 책을 장만하는데, 새책으로 장만한 그 책에 긁힌 자국 하나 없이 알뜰히 건사하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요? ‘더 깨끗한 책’으로 골라서 장만하지만, 막상 ‘더 지저분하게 함부로 굴리지’ 싶어요.
책은 알맹이를 읽습니다. 책은 껍데기를 읽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갓 찍어서 나온 책으로 읽어야 더 잘 읽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 손을 거친 도서관 책을 빌려서 읽어야 더 잘 읽지 않습니다. 여러 집을 돌고 돈 헌책을 헌책방에서 장만해서 읽으니 덜 읽거나 못 읽지 않습니다.
책에 김칫국물이 튄들 대수롭지 않습니다. 김칫국물 때문에 ‘책에 깃든 줄거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책종이가 구겨져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구겨졌기 때문에 ‘책에 담긴 숨결’이 옅어지지 않아요.
..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낡아빠진 기와집이 / 한 마리 / 검은 물고기 같다 .. (물고기 꿈)
이름난 아무개가 쓴 글이기에 대단할 수 없습니다. 삶이 대단할 때에 글이 대단합니다. 사랑과 이야기와 숨결이 대단할 때에 글이 대단하지요.
다시 말하자면, 문학상을 탔기에 글이 대단하지 않습니다. 인기 작가로 되어 책이 많이 팔렸다 하기에 글이 대단하지 않아요. 중앙일간지에 글이 실리면 대단할까요? 대기업 사외보에 글을 실으면 대단할까요?
껍데기는 내려놓아야 해요.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보아야 해요. 사람을 사귈 적에도 이와 같아요. 우리는 마음으로 동무를 삼고 이웃을 사귑니다. 우리는 겉모습이나 은행계좌나 자가용 때문에 동무나 이웃을 만나지 않습니다. 돈을 좀 얻으려고 동무나 이웃을 사귀려 한다면 얼마나 서글픈가요. 어떤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노리며 다가서려 한다면 얼마나 슬픈가요.
.. 빨래를 널고 있는 아내의 등 뒤로 / 살금살금 다가가 / 안고 싶다, 안아보고 싶다 .. (한 아름의 실감)
유홍준 님 시집 《나는, 웃는다》(창비,2006)를 읽습니다. 시를 읽다가 자꾸 생각합니다. 이 시를 쓴 유홍준 님은 삶이 그리 안 즐거울는지 모르겠구나 싶습니다. 그닥 즐겁지 않아 그닥 웃음이 나오지 않는 터라, 자꾸 웃음을 떠올리거나 그리면서 시로 써야 한다고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 추리닝 입고 낡은 운동화 구겨 신고 마트에 갔다 온다 짧은 봄날이 이렇게 무단횡단으로 지나간다 까짓 무단이라는 거 뭐, 별것 아니지 싶다 봄이 지나가는 아파트단지 만개한 벚꽃나무를 보면 나는 발로 걷어차고 싶어진다 .. (벚꽃나무)
벚꽃나무를 걷어차고 싶은 마음은, 송전탑을 걷어차고 싶은 마음도 될 테지만, 가난한 이웃을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섣불리 어떤 것도 걷어차지 마셔요. 남을 걷어차면 나도 걷어차입니다. 사랑하셔요. 사랑은 돌고 돌아 사랑이 됩니다. 미움은 돌고 돌아 언제나 미움 그대로입니다.
전쟁무기는 전쟁을 부를 뿐이에요. 전쟁은 평화를 부르지 않아요. 평화는 오직 평화가 부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벚꽃나무를 어루만지는 마음이 될 때에, 송전탑 때문에 아픈 이웃을 어루만지는 마음으로 이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어루만지고, 돈이나 권력이나 이름에 끄달리는 바보스러운 이웃도 어루만지는 마음으로 이을 수 있어요.
생각해 봐요. 전두환이나 박정희 같은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가요.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사람도 얼마나 불쌍한가요. 나는 이런 이들이 그예 불쌍하게만 보입니다. 삶을 모르고 사랑을 모르며 꿈을 모르는 이런 이들은 이녁 스스로 이녁 삶을 아주 망가뜨렸습니다. 게다가 이녁 삶만 망가뜨리지 않고 이웃 삶까지 망가뜨리지요. 딱한 이들이요 가엾기까지 한 이들입니다. 이들을 걷어차 본들 더 불쌍하기만 합니다. 사랑 없이 자라서 사랑 없이 막짓을 해대는 이들은 그야말로 ‘사랑에 주린 가녀린 목숨’입니다.
.. 이 책이 없었다면 저 벌레를 때려잡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더 뜨거운 냄비를 내려놓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저 삐걱거리는 개다리소반을 바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 (벌레 잡는 책)
책은 나무로 만듭니다. 책을 만들려고 숲에 있던 나무를 벱니다. 유홍준 님 시집도 숲에서 왔습니다. ㅈㅈㄷ이라는 신문도 숲에 있던 나무를 베어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톨스토이 님 책도 유홍준 님 시집도 ㅈㅈㄷ신문도 모두 똑같습니다. 모두 똑같은 숲입니다.
숲을 어떻게 가꿀 때에 즐거울까 생각해 봅니다. 숲에서 피어날 꽃들은 어떤 내음을 퍼뜨려서 어떤 씨앗을 맺을 때에 즐거울까 헤아려 봅니다.
《나는, 웃는다》가 배꽃과 같은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빌어요. 배꽃처럼 웃고, 배꽃처럼 노래하며, 배꽃처럼 우리들 고픈 배를 채우는 맛난 밥 한 그릇이나 열매 한 점과 같은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7.9.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