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커피 2
기선 지음 / 애니북스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375



즐겁게 커피 한 잔

― 오늘의 커피 2

 기선 글·그림

 애니북스 펴냄, 2009.7.24.



  어버이가 차리는 밥을 아이들이 받아서 먹습니다. 아이들은 잘 먹기도 하지만, 잘 안 먹기도 합니다. 잘 먹는 날 왜 잘 먹는가 하고 가만히 보면, 배가 고프기도 하고, 한창 신나면서 즐겁게 뛰놀았습니다. 잘 안 먹는 왜 잘 안 먹는가 하고 곰곰이 보면, 배가 안 고프기도 하며, 제대로 못 놀거나 마음이 무겁습니다.


  똑같은 밥 한 그릇이지만, 아이와 어른 모두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밥맛을 달리 느낍니다. 어른이라면 배가 제법 불렀어도 ‘차린 이 손길’을 헤아리며 더 먹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이 대목까지 헤아리지는 않아요.


  아이들은 배가 고플 적에 잘 먹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익숙한 것을 잘 먹습니다. 어버이가 즐겁게 먹는 것을 으레 보기 마련이니, 입뿐 아니라 눈과 코와 귀에 익숙한 것을 한결 잘 먹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을 먹든 그리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적에 영양소만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양소를 고루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만, 영양소를 살피느라 밥 한 그릇에 담을 마음을 놓친다면 어떡할까요. 마음이 깃들지 않은 밥을 먹으면 어떤 기운을 얻을까요.





- “제가 직접 숯불에 볶은 원두입니다.” “손으로 직접 갈다니!” “우와, 절에서 커피를. 특이하다!” “해림 스님, 물이 다 된 것 같습니다.” “벌써? 아니다. 아직 익으려면 좀더 있어야 돼.” ‘물이 익는다고? 게다가 온도계도 없이 적정온도를 어떻게 알아내지?’ (39쪽)

- “스님, 대체 이 맛의 비결은 뭔가요?” “비결이라.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그저 대자연이 베푸는 자비를 고이 받았을 뿐이지요. 아침 일찍 산 정상에서 맑은 물을 길어와, 수행하는 마음으로 보살피고 익혀, 불심으로 볶은 커피콩에 흘려보냈을 뿐입니다.” (42쪽)



  기선 님 만화책 《오늘의 커피》(애니북스,2009) 둘째 권을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커피 한 잔은 맛있게 마시면 참으로 좋을 텐데, 맛있을 뿐 아니라 즐겁게 마시면 더없이 좋습니다. 아니, 맛있기만 한 커피일 때에는 어딘가 모자라요.


  생각해 봐요. 가시바늘 같은 곳에서 맛만 있는 커피를 마실 적에 즐거울까요? 느긋한 곳에서 맛은 좀 떨어지는 커피를 마실 적에 즐거울까요? 거북한 곳에서 맛만 있는 커피를 마실 적하고,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어나는 곳에서 맛은 좀 떨어지는 커피를 마실 적하고, 어느 쪽이 즐겁게 마시는 커피가 될까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한 곳이라면, 몸도 마음도 안 즐겁습니다. 입으로 마실 뿐 아니라 온몸을 확 깨우는구나 하고 느낄 만한 곳에서 마실 때에 즐겁습니다.


  더 생각할 수 있어요. 시멘트를 퍼부어 만든 청계천 한켠에서 마시는 커피하고, 골짝물이 싱그럽게 흐르는 숲속에서 마시는 커피를 생각해 봐요. 고속도로 옆에서 마시는 커피하고, 우람하게 잘 자란 나무그늘에서 마시는 커피를 생각해 봐요. 핵발전소를 코앞에 두고 마시는 커피하고, 너른 바다가 파랗게 눈부신 곳에서 햇볕을 따사롭게 받으며 마시는 커피를 생각해 봐요.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갇힌 학교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하고, 아이들이 하하호호 웃고 뛰노는 골목에서 마시는 커피를 생각해 봐요.




- “마침 동생 분도 오셨으니 이참에 하산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하, 하지만 전 아직 번뇌를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집착하는 것 또한 번뇌입니다. 깨달음의 길은 장소와 상관없는 것이지요. 보살님은 아직 속세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53쪽)

-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맛있는 걸 먹었던 게 언제였더라? 이거,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죽도록 맛있어.’ (157쪽)



  마음이 즐겁다면 어디에서라도 즐겁습니다. 여러 시간 달리는 시외버스에 있건, 사람들이 빼곡한 전철에 있건, 코를 찌르는 냄새가 가득한 공장 옆에 있건, 마음이 즐겁다면 어디에서라도 즐겁습니다. 마음이 즐겁지 않다면 어디에서라도 즐겁지 않습니다. 푸른 바람이 부는 곳에 있든, 멧꼭대기에 있든, 무지개 드리운 들판에 있든, 마음이 즐겁지 않다면 어디에서라도 안 즐겁습니다.


  누군가 새벽에 길어 놓은 물도 정갈합니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 길어 온 물도 정갈합니다. 누군가 새벽에 어떤 마음으로 물을 길었을까 떠올리면서 물 한 그릇 즐겁게 씁니다. 내가 스스로 새벽에 길어 온 물을 그리면서 물 한 그릇 알뜰히 씁니다. 반가운 동무한테 건넬 웃음을 떠올리면서 차 한 잔 끓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곱게 다스리려고 차 한 잔 끓입니다.


  물 한 잔을 앞에 놓고 삶을 생각합니다.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사랑을 생각합니다. 물 한 접시를 떠서 바라보면서 꿈을 생각합니다. 그저 배가 고파서 짓는 밥일까요. 그저 아이들을 먹이려고 짓는 밥일까요. 밥을 먹어 얻는 기운으로 무엇을 할까요. 오늘 하루는 어떻게 맞아들여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삶을 지을 때에 즐거울까요.




- “직원도 몇 명 늘렸다면서?” “네, 파티시에와 바리스타가 한 명씩 늘었더군요.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많이 밝아졌습니다.” “분위기가 많이 밝아져? 어떻게?” (167쪽)

- “물론 저처럼 해외유학을 다녀온 사람들도 다수 있구요! 그런 사람들 중에서 최고를 가리는 신성한 대회입니다! 혹시 바리스타 자격시험 정도로 착각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현장경험, 해외유학, 물론 중요합니다. 저도 분명 그런 과정을 몇 년씩 거쳐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지만 난지 씨는 그런 제가 인정한 사람입니다. 아직 익혀야 할 게 태산 같긴 하지만, 전 이 친구의 카푸치노에서 이론과 상식을 뛰어넘는 재능을 봤습니다.” (182∼183쪽)



  세 권짜리로 나온 만화책 《오늘의 커피》 가운데 둘째 권에서는 ‘으뜸 커피지기’를 뽑는 대회에 나가려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서울에서 커피집을 꾸리는 주인공 하나는 이녁 커피집이 어딘가 우중충하면서 장사가 잘 안 되는 줄 깨닫습니다. 무엇인가 바꾸려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릅니다. 나이가 어린 탓에 잘 모르지 않습니다.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 잘 모릅니다.


  가게에 있는 걸상도, 가게를 꾸민 살림도, 딱히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커피를 갖추고, 커피와 곁들일 입가심을 어떻게 마련하면 좋을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커피집을 꾸린다면, 어떤 마음으로 꾸려야 할까요. 밥집을 꾸리거나 술집을 꾸리거나 옷집을 꾸린다면, 어떤 마음으로 꾸려야 할까요. 책방을 꾸리거나 빵집을 꾸린다면, 어떤 마음이 되어 꾸릴 때에 우리 삶을 즐겁게 북돋울 만할까요.


  그나저나 만화책 《오늘의 커피》는 세 권으로 ‘커피’ 이야기를 간추리려 하다 보니 줄거리가 갑작스레 너무 빨리 흐릅니다. 조금 더 찬찬히 지켜보고, 조금 더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커피맛과 커피내음을 즐겨도 되었을 텐데 싶습니다. 휙휙 빨리 건너뛰거나 달려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굳이 맞수를 두거나 여럿이 부딪히거나 다투는 얼거리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으뜸 커피맛과 버금 커피맛은 없습니다. 즐거움은 숫자로 가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삶은 등수로 줄을 세우지 못합니다. 보여줄 이야기나 들려줄 웃음이 훨씬 많았을 텐데, 여러모로 아쉬움을 접고 둘째 권을 덮습니다. 4347.9.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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