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지 않은 무지개
시외버스를 아홉 시간 즈음 탔을까. 지칠 만큼 지친 몸으로 고흥읍에서 비로소 마지막 시외버스를 내린다. 그런데 우리 마을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는 십 분쯤 앞서 떠났다. 이웃마을로 지나가는 버스도 없고, 두 시간을 기다리면 막차 하나는 있다. 한참 망설인 끝에 택시를 타기로 하고, 읍내에서 먹을거리를 장만하자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으로 가게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나를 부른다. 읍내 택시 아재이다. 우리 식구가 단골로 타는 택시 아재이다. 이따가 타기로 하고 인사를 한 뒤 가게로 다시 걸으려는데, 택시 아재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내 뒤쪽에 드리운 무지개를 알아차린다. 어어. 무지개네. 어마어마하게 큰 무지개네.
군내버스가 바로 있어서 탔다면 무지개를 못 봤으리라. 다른 쪽으로 갔어도 하늘에 무지개가 걸린 줄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거의 뒷걸음을 걷다시피 하면서 무지개를 바라본다. 가만히 보니 외무지개 아닌 겹무지개이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만난 무지개인가. 이 얼마나 오랜만에 제대로 만난 무지개인가. 집에 전화를 건다. 아이들이 무지개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전화를 거니, 마당에서 벌써 봤단다. 얼마나 크게 걸린 무지개일까. 내가 선 곳에서 십오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았다면, 그곳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무지개가 걸렸으나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무지개가 걸렸기에 하던 일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읍내 하나로마트 일꾼들도 무지개를 보고는 일손을 멈추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고등학교 아이도, 아이를 데리고 가게에 온 아주머니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무지개를 사진으로 담는다. 무지개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 얼굴을 보는데, 몹시 맑다.
일곱 가지 빛깔이란 무엇일까. 일곱 가지 별빛이란 무엇일까. 일곱 가지 삶자리란 무엇일까.
내가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본 날을 어림해 본다. 2008년 무렵 인천에서 꼭 한 번 아주 흐릿한 무지개를 아주 먼 데에서 본 적이 있고, 이에 앞서는 국민학교 다닐 적에 보았지 싶다. 이렇게 또렷한 무지개는 처음 보았으며, 이처럼 무지개를 가까이 두고 보기도 처음이요, 겹무지개는 서른 해만에 보았지 싶다.
무지개를 잃어버리지 않았구나. 무지개는 늘 우리 곁에 있구나. 내가 마음속에서 늘 그리고 생각하면, 무지개는 조용히 우리한테 찾아오는구나. 4347.9.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904/pimg_7051751241063776.jpg)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904/pimg_7051751241063777.jpg)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904/pimg_705175124106377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