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벼꽃에 빗물



  벼꽃이 핀다. 그런데 비가 온다. 지난해에는 비가 없이 그토록 뜨거운 여름이더니, 올해에는 비가 제법 잦다. 그런데, 해가 너무 덜 든다. 닷새쯤 따사롭게 볕을 비추고 나서 하루쯤 비가 오면 딱 알맞을 텐데. 이틀 뜨끈뜨끈 하고 하루는 구름이 살랑살랑 흐르다가 이틀 뜨끈뜨끈 한 뒤 비가 한 줄기 시원하게 내리면 꼭 알맞을 텐데. 가끔 소나기가 한 차례 뿌리고는 다시 말끔히 해님이 고개를 내밀면 참으로 알맞을 텐데.


  벼꽃이 피는 늦여름이다. 이 늦여름에 벼꽃을 헤아리는 이웃은 얼마나 있을까. 내 이웃은 벼꽃을 생각하면서 밥을 먹을까. 내 이웃은 벼꽃을 예쁜 눈길로 마주하면서 즐겁게 노래하는 삶을 아침마다 지을까.


  꽃대가 곧게 오르면서 봉오리가 맺힌다. 봉오리마다 암술과 수술을 내민다. 자그마한 벼꽃은 꽃가루받이를 해야 알맹이가 익을 수 있다. 벼를 처음 심던 지난날을 떠올려 본다. 기계도 농약도 비료도 비닐도 안 쓰고 논을 돌보던 지난날을 그려 본다. 지난날에는 바람이 꽃가루받이를 해 주었다. 수많은 거미와 날벌레와 잠자리와 나비와 벌이 꽃가루받이를 해 주었다. 개구리를 잡으려고 논에 내려앉는 새들이 볏포기 사이를 오가면서 꽃가루받이를 해 주었다. 그리고, 즐겁게 노래하면서 씩씩하게 박힌 꾸덕살이 가득한 손으로 흙을 만지던 사람들이 베푸는 사랑을 받아 알알이 열매를 맺었다.


  요즈음은 기계로 후다닥 어린 볏싹을 심으니 벼꽃도 한꺼번에 핀다. 예전에는 손으로 차근차근 어린 볏싹을 심거나 볍씨를 뿌렸으니, 벼꽃도 차근차근 피었다. 벼꽃이 피는 늦여름에 팔월이 새로운 빛이 된다. 4347.8.1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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