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박나무 가랑잎과



  마당에 놓은 평상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다가 후박나무 가랑잎을 하나 만납니다. 후박나무 가랑잎은 내 그림 한복판에 톡 떨어집니다. 문득 후박나무를 올려다봅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나한테 찾아왔니. 내 마음에 어떤 빛이 흘러서 나한테 왔니. 쓸쓸한 빛이나 고단한 빛을 느껴서 나한테 왔니.


  그림을 그리다가 멈추고 가랑잎을 바라봅니다. 바람이 불 때에 살짝 흔들리면서 그림종이에 그대로 머무는 가랑잎을 바라봅니다.


  나무에 달린 나뭇잎을 보면, 똑같이 생긴 나뭇잎은 없습니다. 푸른 빛깔이 사라지고 누렇게 마른 가랑잎을 보아도, 똑같이 생긴 가랑잎은 없습니다.


  지구별에 수십 억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데, 다 다른 사람입니다. 다 다른 넋이고, 다 다른 숨결입니다. 나무 한 그루에 수천 수만 수십만 잎이 있는데 참말 다 다릅니다. 우람한 나무 몇 그루라면 수십억 잎이라고 할 만한데, 참으로 모두 다른 잎입니다. 떡갈잎이라든지 느티잎이라든지 은행잎이라든지, 똑같은 잎이 없습니다. 논에 심은 벼포기도 똑같지 않습니다. 유전자를 건드린 콩이라 하더라도, 새싹 모습부터 줄기와 잎사귀 모습까지 모두 다르고, 땅밑에 내리는 뿌리도 모두 달라요.


  이웃이 모두 다른 넋인 사람인 줄 알 수 있다면, 나는 나 스스로 어떤 넋인 줄 알 수 있을까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숨결인 줄 바라볼 수 있으면, 나는 나 스스로 어떤 숨결인 줄 바라볼 수 있을까요. 한참 동안 후박잎을 보다가 다시 크레파스를 손에 쥡니다. 4347.8.1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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