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려고 만드는 책
모든 책은 읽히려고 만든다. 아름답구나 싶은 이야기를 알뜰살뜰 담아서 널리 읽히려고 만든다. 삼백 권을 찍는 책은 삼백 사람한테 읽히려는 뜻으로 만든다. 그러나 삼백 사람한테만 읽히고 싶지 않다. 삼백 사람을 비롯하여 삼천 사람과 삼만 사람한테 아름다운 넋을 나누어 주면서 함께 즐기고 싶다. 삼천 권을 찍는 책은 삼천 사람한테 읽히려는 뜻으로 만든다. 그러나 삼천 사람한테만 읽히고 싶지 않다. 삼천 사람을 비롯하여 삼만 사람과 삼십만 사람한테 아름다운 숨결을 베풀면서 같이 누리고 싶다.
삼백 사람한테 읽히려고 찍은 삼백 권이 때로는 삼백 사람은커녕 서른 사람한테 가까스로 읽힐 수 있다. 삼천 사람한테 읽히려고 찍은 책이 삼천 사람은커녕 삼백 사람한테 겨우 읽힐 수 있다. 그렇지만, 서른 사람이 알아보았고 삼백 사람이 사랑했다. 서른 사람 손길을 타며 즐겁게 피어나고, 삼백 사람 눈길을 받으며 살가이 노래한다.
오늘 읽히는 책이 있다. 모레 읽히는 책이 있다. 어제 읽힌 책이 있다. 먼 앞날에 읽히는 책이 있다.
누가 알아보는가. 누가 사랑하는가. 어떻게 알아보는가. 어떻게 사랑하는가. 책을 읽히려는 손길에는 얼마나 넓고 깊은 사랑이 깃드는가. 책을 읽으며 즐겁게 웃는 손길에는 얼마나 기쁘며 반가운 꿈이 자라는가.
오랫동안 읽히지 못한 채 먼지만 곱게 내려앉은 책을 바라본다. 살살 쓰다듬는다. 책에 내려앉은 먼지가 내 손가락과 손바닥에 까맣게 묻는다. 이 먼지는 무엇일까. 이 고운 책먼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오늘 치운 책먼지는 며칠 뒤 다시 내려앉을까. 오늘은 누군가 책먼지를 닦아 주었으나 몇 해 지나도록 다시 책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을까. 4347.4.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