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44] 새하얀 눈밭
― 해마다 한 번 찾아오는 빛
지난밤에 달무리가 지더니 이튿날 눈밭이 됩니다. 지난밤 한쪽 하늘은 별빛이 초롱초롱하고 다른 한쪽 하늘은 달무리로 뿌얬는데, 그예 이튿날 눈보라가 날립니다. 다른 고장으로 치면 눈보라란 이름을 붙이기 멋쩍지만, 고흥에서는 눈보라라 할 만한 눈발입니다. 밤부터 아침까지 눈이 그득그득 내려서 쌓입니다.
다만, 워낙 포근한 고흥인 터라, 고무신이 폭 잠길 만큼 눈이 내리더라도, 아침 열한 시를 지나 열두 시가 되면서 거의 다 녹고, 낮 한 시가 되니 언제 눈이 내렸느냐는 듯이 모두 녹아 사라집니다.
고흥에서 살아가며 한 해에 꼭 한 차례씩 눈밭을 만납니다. 두 차례나 세 차례도 아닌 한 해에 꼭 한 차례입니다. 그리고, 이 눈밭은 열두 시를 넘기면서 씻은 듯이 사라집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언제 눈발이 퍼부었느냐는 양, 아무 자국이 안 남습니다.
아이들은 눈을 맞으면서 놉니다. 눈을 맞으면서 놀다가 춥다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눈이 녹고 나니 햇볕이 쨍쨍 비추고,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마당으로 나가서 놉니다. 군데군데 조금 남은 얼음조각을 들고 입에 넣기도 하고 한참 손에 쥐면서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마을에 자가용 끄는 사람이 없으니, 눈이 오건 말건 아무도 안 쓸고 안 치웁니다. 쓸 까닭이나 치울 까닭조차 없도록 눈은 스스로 내려서 스스로 재빨리 녹아 사라집니다. 눈이 오면 모두들 대청마루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을 구경할 테지요. 하얗게 쌓이는 고운 빛을 바라보며 논과 밭과 숲과 들을 넉넉히 덮는 반가운 눈을 노래하겠지요.
한 차례 내린 뒤 바로 녹은 눈은 새봄을 재촉합니다. 겨우내 딱딱하게 언 땅이 보드랍게 풀립니다. 눈 내려 녹은 자리마다 푸른 빛이 감돕니다. 4347.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