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시선 290
장철문 지음 / 창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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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46

 

 

시와 아이와
― 무릎 위의 자작나무
 장철문 글
 창비 펴냄, 2008.7.25.

 


  아이들은 날마다 노래를 부릅니다. 가락을 입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아무런 가락이 없이 조잘조잘 재잘재잘 도란도란 수런수런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아이와 하루 내내 함께 지내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이 들려주는 노래를 늘 듣습니다. 귀담아듣든 흘려듣든 늘 노래를 들어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누군가는 이 노래를 종이에 정갈하게 옮겨적습니다. 누군가는 이 노래를 마음에 담습니다. 누군가는 이 노래를 한귀로 흘립니다. 누군가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켜서 이 노래가 사그라들도록 잠재웁니다.


..살모사도 밥을먹느라고 벼포기 사이에서 뜸부기 둥지로 머리를 내민다 ..  (8월의 식사)


  올해로 일곱 해째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큰아이한테,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하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한참 노래를 들려주다가 늘 가만히 되뇝니다. 이 노래에는 뜸북새가 나와요. 그러면,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 논배미에 뜸북새 있는가? 나도 곁님도 아이도 뜸북새를 본 적이 없고, 찾을 길 없는데, 이 노래를 들려줄 만한가? 노래로는 즐겨도 될까? 볼 수 없는 새를 노래하면 우리 마음에서 무엇이 자랄까? 뜸북새는 시골 논배미에 다시 찾아들 수 있을까? 시골 아재 아지매는 기계를 내려놓고 호미와 쟁기와 가래와 낫을 들고 논배미에서 풀내음을 맡을 수 있을까?


.. 아이가 운다. 낮잠에서 깨어나 머리하러 간 엄마를찾아 운다. 안아도 얼러도 장난감을 주어도 관심 밖이다. 마루로 부엌으로 방으로 베란다로 두리번거리며 운다. 아빠의 얼굴을 만지며 운다. 아빠의 목을 더듬으며 운다. 아빠에게 애원해도 엄마가 없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가 운다 ..  (아내가 머리하러 간 사이)


  아이가 날마다 노래를 하듯이, 나도 날마다 노래를 합니다. 이루지 못하는 꿈이 있으면 어서 이루기를 바라며 노래를 합니다. 이루는 꿈이 있으면 즐겁게 이루네 하고 노래를 합니다. 사랑을 꿈꾸며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을 속삭이며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노래를 합니다.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나도 따라서 노래를 합니다. 밥을 지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밥을 차리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밥상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이를 부르다가 노래를 부릅니다. 수저를 들며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 옷가지를 손으로 복복 비벼서 빠는 동안 노래를 합니다. 잘 빨아서 잘 마르기를 바라며 마당에 옷가지를 널 적에 노래를 합니다. 해바라기를 하며 노래를 하고, 빨래를 걷어서 개는동안 노래를 합니다.


.. 아가야, 이 소똥하고 이마받이한 녀석아! / 아빠한테 삼촌이 있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다 ..  (소주를 먹다)


  삶이란 언제나 노래이지 싶어요. 삶이란 늘 노래로 거듭나지 싶어요. 삶이란 노상 노래가 있어 아름답구나 싶어요.


  노래가 없으면 어떤 하루가 될까요. 노래가 없이 어떤 재미가 있을까요. 대중노래도 좋고 일본노래나 서양노래도 좋습니다. 어느 노래이든 좋습니다. 새가 지저귀는 노래도 좋고,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도 좋아요. 노래가 없는 삶이란 따분하고, 노래가 있는 삶이란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답고 싶어 노래를 해요. 사랑스럽게 살아가고 싶어 노래를 해요. 나긋나긋 상냥하게 노래를 합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노래를 하고, 활짝 함박웃음 터뜨리면서 노래를 합니다.


.. 아빠, 나는 잠 안 자고 / 아직 깨어 있는데 / 왜 밤이 오는 거지? / 똥 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앉아서 / 파래지는 바깥을 보는 시간 / 아이를 향해 희게 웃으며 / 목 놓아 우는 시간 /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행복한 시간 .. (똥 누는 시간)


  장철문 님 시집을 읽습니다. 무릎에 무슨 자작나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장철문 님이 날마다 누리는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처음에는 맨숭맨숭 알쏭달쏭하다가,  아이 이야기가 나오면서 눈빛 반짝반짝 밝히더니, 다시 아이 이야기가 사그라들면서 민숭민숭 아리송하게 흐르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 살아서 처음 // 아버지 손도 따뜻했다 ..  (손)


  아이하고 노닥거리는 하루를 조금 더 들려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입맛을 다십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저씨 시인이란 드물거든요. 그나마 이렇게 포대기를 두르며 아기를 달랜 하루를 시로 적바림하는 아저씨 시인이란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시란 얼마나 쉬운가요. 시란 얼마나 재미있는가요. 시란 얼마나 착한가요. 시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시란 얼마나 좋은가요.


  일곱 살 아이하고 읽을 시를 써 보셔요. 일흔 살 할매하고 나눌 시를 써 보셔요. 문학비평가나 국문학과 학생한테 읽힐 시가 아닌, 대입시험 문제로 나올 시가 아닌,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옷을 입는 시가 아닌, 아이와 노래할 시를 써 봐요. 할매와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출 만한 시를 써 봐요.


.. 할아버지와 손녀와 손자와 할머니와 큰엄마와 엄마와 큰아빠와 아빠와 작은엄마와 작은아빠가 냉이를 캐러 가고 있다 ..  (길목)


  우리들은 모두 아이입니다. 나를 낳고 돌본 어버이 곁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어버이입니다. 내가 낳아 돌보는 아이 곁에서 우리는 모두 어버이입니다. 곧, 우리들은 모두 사람이고, 사랑이며, 숨결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빛이고, 바람이며, 햇살입니다.


  시를 써요. 사람다운 눈빛 밝히면서 시를 써요. 시를 노래해요. 사랑스러운 바람이 산들산들 흐르는 시를 노래해요. 아이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맑게 웃고 시를 써요. 아이가 흐드러지게 놀도록 마당을 내주면서 다 같이 시를 노래해요. 4347.1.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재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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