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장만하는 책

 


  꼭 마흔 살 먹은 그림책을 다시 장만한다. 일본에서 1973년에 처음 나오고 한국에서 2008년에 처음 옮긴 그림책인데, 몇 해 앞서 한 권 장만했는데, 도무지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아서 다시 장만하기로 한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그림책 하나 다시 장만한 줄 모른다. 그동안 찾던 책이 짠 하고 나타나니 반가울 뿐이다.


  어디엔가 있는 책을 다시 산다면, 같은 책을 집에 두 권 건사하는 셈일 텐데,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책이라면 두 권 아닌 세 권이나 네 권이 있어도 즐겁다고 느낀다. 아이들과 살아가며 새롭게 느낀다. 하나는 예쁘게 건사하는 책으로 삼아, 아이들이 자라 어른 되어 저희 아이를 낳을 적에 물려주거나 선물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닳고 낡도록 신나게 들여다보는 책으로 삼을 수 있다.


  예전에는 ‘같은 책 다시 살 돈’이 있으면 ‘새로운 다른 책을 하나 더 사자’고 여겼지만, 이제는 굳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다른 책을 장만할 돈은 언제라도 새롭게 벌어서 누릴 수 있다고 깨닫는다. 스스로 돈이 없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책을 장만하지 못한다고 깨닫는다. 나한테는 내가 즐겁게 읽고픈 책을 모두 읽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살림이라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책을 장만할 만하다고 깨닫는다.


  왜냐하면, 한 달에 오백만 원이나 천만 원을 번다 하더라도 이것 하랴 저것 하랴 한 달에 책값 만 원조차 못 쓰는 사람이 있다. 한 달에 천만 원 벌면서 이웃돕기에 만 원을 못 쓰는 사람이 있다. 한달에 이십만 원이나 오십만 원 벌면서 이웃돕기에 만 원을 잘 쓰는 사람이 있고, 내 살림을 돌아보면 한 달에 십육만 원 벌던 신문배달부 적에도 다달이 구만 원을 적금으로 부으면서 남은 돈으로 책을 사서 읽곤 했다.


  돈이 아니라 마음에 걸린 일이 책읽기라고 할까. 마음이 있을 때에 책을 장만한다. 마음이 있을 때에 책을 펼쳐 읽는다. 마음이 있을 때에 책에 서린 넋을 즐겁게 받아안는다. 마음이 있을 때에 책 하나 읽으며 삶을 새롭게 가다듬어 스스로 거듭난다.


  마음이 없을 때에는 책을 장만하지 않는다. 마음이 없을 때에는 책을 펼칠 틈이 없다고 여긴다.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애써 책을 읽어도 책에 서린 넋을 제대로 맛보거나 살피지 못한다. 마음이 없을 때에는 책 하나 읽으며 스스로 삶을 새롭게 가꾸지 못한다.


  내 둘레 이웃들 누구나 마음 느긋하고 넉넉하며 아름답게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빈다. 마음이 느긋하고 넉넉하며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책을 읽으며, 다른 이웃한테 사랑스레 손길을 건넬 수 있고, 이 지구별을 푸르게 가꾸는 빛을 베풀 테니까. 4346.12.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다시 장만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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