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줍기

 


  시골에서는 길을 걷다가 볼펜 주울 일이 없다. 도시로 마실을 갈 적에는 곧잘 길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보곤 한다. 저 볼펜 누가 떨어뜨렸을까, 저 볼펜 왜 떨어졌을까, 가만히 생각하다가 걸음을 멈춘다. 값비싼 만년필이 아니고서는 볼펜을 찾으러 길을 돌아올 사람이 없으리라 본다. 도시에서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뿐 아니라, 길바닥 안 보고 걷는 사람들이 밟아서 볼펜이 망가질 테니, 으레 볼펜줍기를 한다.


  내가 글 쓰는 일 안 했더라도 볼펜줍기를 했을까, 하고 돌아본다. 중학생 적에도 국민학생 적에도 으레 볼펜줍기를 했으니, 또 연필줍기도 했으니, 글쓰기와는 얽히지 않겠지. 아주 짧고 닳은 몽당연필이더라도, 길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연필을 지나치지 못했다. 짜리몽땅한 연필은 빈 볼펜대에 끼워서 쓰면 되기도 하고, 저렇게 닳고 짤아질 때까지 사랑받던 손길을 모르는 척 지나칠 수 없기도 하다.


  형이 살아가는 인천 골목집에서 잘 묵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골목집 문간에 볼펜 하나 덩그러니 있다. 누가 떨구었을까. 가방이 무겁지만 살살 쪼그려앉아서 줍는다. 너 어쩌다 여기 떨어졌니, 하고는 공책에 슥슥 그어 본다. 안 나온다. 응? 아, 다 쓴 볼펜인가 보구나. 다 썼기에 이렇게 누군가 길바닥에 던져 버렸나 보구나.


  다 쓴 볼펜을 주운 셈이네, 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면 이 볼펜을 다시 내려놓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가, 차마 길바닥에 내려놓지 못한다. 내 손에 있으면 빈 볼펜이더라도 볼펜이지만, 길바닥에 놓이면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통에 넣어도 쓰레기 된다. 시골집 우리 서재도서관 책꽂이 한켠에 놓을까. 그러면 이 빈 볼펜 이제껏 사랑받으며 살아온 나날 조용히 쉴 만할까. 앞가방 주머니에 빈 볼펜 꽂는다. 4346.12.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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