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쌀 씻고 설거지
한밤에 보일러를 돌린다. 우리 집 보일러는 땅밑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올려 돌아가기에, 보일러를 돌리면서 지난저녁 남긴 그릇들을 설거지한다. 물이 잘 돌도록 틀어서 쓴다.
저녁을 먹고 나서 모든 그릇을 설거지할 수 있지만, 일부러 얼마쯤 남긴다. 왜냐하면 밤에 아이들 쉬를 누이면서, 또는 한밤이나 새벽에 보일러 돌릴 무렵, 물이 잘 흐르도록 하려면 물꼭지를 틀어 땅밑에서 물을 뽑아올려 주어야 하니까. 이렇게 하자면 조금 번거롭기는 한데, 어차피 밤에 일어나서 아이들 쉬를 누여야 하고, 나도 내 일을 밤이나 새벽에 하니까, 다 괜찮다. 아이들 아침에 먹일 밥도 한밤이나 새벽에 미리 씻어서 불려야 하니까, 어차피 이렇게 해야 한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아침까지 안 깨고 잔다면 한결 개운할까? 아마 그러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밤에 잠을 깨어 아이들 쉬를 누인 뒤, 오줌그릇 들고 마당으로 내려와서 한밤에 눈부시도록 밝은 별빛과 달빛 올려다보기를 즐긴다. 아이들이 밤오줌을 누어 주기 때문에, 나로서는 아주 스스럼없이 밤빛을 실컷 누린다.
실컷 누린 밤빛을 마음으로 담아 부엌으로 가서 쌀을 씻는다. 설거지를 마무리짓는다. 새로 뜬 물을 유리병에 담는다. 유리병에 담아 이틀쯤 묵힌 물을 달콤하게 마신다.
예부터 한집 살림 맡은 어머니는 새벽 세 시 반 즈음 조용히 일어나 맑은 물 한 그릇 길어서 부엌님한테 올렸다고 한다. 내 밤설거지도 이와 같다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시골집조차 부엌님이나 뒷간님이나 집님이나 모두 사라졌다고 할 만하지만, 그래도 우리 보금자리 돌보는 넋이 가까이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음을 담아 물 한 그릇 올리고, 나도 이 물을 함께 마신다. 4346.11.1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