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3.11.9.
 : 가을비 맞으며

 


- 도화고등학교 학생 둘이 서재도서관에 찾아왔다. 비구름 그득해서 날이 어둑어둑하기에 도서관은 슥 둘러보기만 하고, 함께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고는 저마다 돌아갈 집이 있어 마을 어귀로 나와 군내버스를 기다린다. 한 아이는 남성마을로, 한 아이는 고흥읍으로 간다. 저녁 일곱 시 오 분이 군내버스가 두 갈래로 들어온다, 읍내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가 더 일찍 오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두 버스가 나란히 마을 어귀에 선다. 두 아이가 버스 타는 모습을 보고 나서 자전거를 달린다. 오늘은 가을비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다.

 

- 내 비옷이 작다. 그러께까지 쓰던 비옷은 워낙 오래 입은 탓에 곳곳이 찢어져 비옷 구실을 못한다. 게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면소재지에서 비옷을 새로 장만했으나, 시골 면소재지에서 가장 큰 비옷이라 하는데에도 내 몸에는 꼭 붙는다. 가방을 등에 짊어진 채 입을 만한 비옷은 큰도시로 가거나 인터넷으로 알아보아야 하려나.

 

- 가을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달린다. 오늘은 모자를 깜빡 잊고 나온다. 모자가 없으니 안경을 쓰기는 했어도 눈과 얼굴로 빗물이 들이붓는다. 가을비 가운데 첫가을이나 한가을 아닌 늦가을 내리는 비이기 때문인지 자전거를 달리는 손이 시리다. 고흥은 포근한 겨울이라 겨울눈 구경하기 어려운 만큼, 겨울에도 겨울비 맞으며 자전거를 달려야 할는지 모른다. 빗길에 쓸 만한 장갑을 한 벌 마련해야 할까 싶다.

 

- 면소재지로 가는 길에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시골길을 오가는 자동차 없으니 느긋하게 달리면서 느긋하게 하늘바라기를 한다. 비 내리는 소리, 빗물이 비옷 때리는 소리, 빗방울이 논과 밭과 길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먼 멧자락마다 비구름 깊이 드리우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본다.

 

- 면소재지 가게에 들르는데, 며칠 뒤에 무슨 날인지 가게 한쪽에 빼빼로가 수북하게 쌓인다. 그렇구나, 무슨 날이 있구나. 작은 빼빼로 한 통을 골라 본다. 면소재지 빵집에 들러 네모빵을 장만한다. 하루 지난 빵이라며 500원을 에누리해 준다. 하루 안 지났어도, 이틀 지났어도, 다 괜찮은데.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빗줄기가 가늘다. 조금 더 천천히 달려 본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는 천등산 멧자락이 훨씬 잘 보인다. 입을 헤 벌리며 자전거를 달린다. 빗길 자전거란 참 그윽하구나. 이 가을에 이 빗길을 달리며 저 멋스러운 모습 누릴 수 있으니 더없이 즐겁구나. 비옷이 너무 작아 사진기는 두고 왔다. 저 아름다운 비구름과 멧자락을 사진으로 담지 못하니 서운하고, 이 모습을 나 혼자만 누리는구나 싶어 아쉽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가을비 숲바람이 파고든다. 이 느낌을 잘 잡자. 다음에 큼지막한 비옷 장만한 뒤에 빗길 시골마을 빛살을 사진으로 담자.

 

- 신기마을 앞에서 짐차 하나가 자전거 달리는 길로 마주 달린다. 저런 미친 놈이 다 있나 하면서도 그대로 달리다가, 내가 옆 찻길로 꺾는다. 엉뚱한 찻길로 달리는 짐차가 제길로 들어설 생각을 않는다. 틀림없이 마을회관에서 술 퍼마시고 달리는 사람이 탔으리라. 어떻게 저리도 터무니없이 자동차를 모는가. 어느 찻길로 달려야 하는 줄조차 모르면서 자동차를 술기운으로 달려도 되는가. 시골에서 바쁜 들일 다 끝난 요즈음, 할배들은 하나같이 날이면 날마다 술이다. 바쁜 일철이 아니어도 할배들은 들일 하는 동안 소주 한두 병 가볍게 깐다. 막걸리도 잘 안 마시고 다들 소주를 들이켠다. 작은 병 아닌 큰 병으로 훌떡훌떡 마신다. 술기운으로 경운기와 짐차와 오토바이를 몬다. 시골 할매나 할배 가운데 긴긴 겨울에 책을 벗삼아 마음밥 먹는 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할매들은 여자 마을회관에서 화투를 치고, 할배들은 남자 마을회관에서 소주를 퍼붓는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짚삶이 사라진 뒤, 이제 시골마다 겨울에는 온통 화투판과 술판만 남는다. 시골마을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는 모조리 도시로 떠났으니, 시골에서 무언가 남다르거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거나 자라지도 않는다. 가을비 뿌리는 오늘 같은 날, 들빛과 숲빛과 바다빛과 마을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누리는 눈빛이 어디에도 없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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