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읽기
책을 후다닥 읽어서 가슴에 무엇이 남을까. 길을 빨리 달려서 마음에 무엇이 깃들까. 밥을 허둥지둥 먹어서 몸이 얼마나 즐거울까. 여행을 서둘러 다녀서 가슴에 어떤 이야기 남을까.
시험을 앞두고 온갖 교재와 참고서를 후다닥 읽거나 재빨리 외워야 할는지 모른다. 벼락치기라고도 하지만, 후다닥 살피고 후다닥 외워서 문제풀이 잘 한다 한들, 이렇게 해서 받는 조금 더 높은 점수는 내 삶을 얼마나 살찌울 만한가.
책 한 권 더 읽으면 내 삶은 더 아름다울 수 있는가. 책 한 권 덜 읽으면 내 삶은 덜 아름다운가. 돈이 넉넉해 책 한 권 더 장만해서 갖출 수 있으면 내 서재나 책꽂이는 한결 더 아름답다 할 만한가. 돈이 모자라 책 한 권조차 장만하기 힘들면 내 서재나 책꽂이는 한결 허술하거나 모자르다 싶은가.
버스나 기차를 타거나 내릴 적에 보면, 으레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슬그머니 내 앞이나 내 앞 다른 사람 사이로 끼어든다. 참말, 새치기이다.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느 때에는 가만히 지켜본다. 저 사람들은 새치기를 하는 만큼 목숨을 그만큼 재촉하는 터라, 슬프게도 스스로 빨리 죽고픈 마음이니까. 여느 때 아닌 아이들이 곁에 있고 아이들이 힘들어 할 적에는 새치기하는 사람을 부른다. 여보소, 이녁 뭐 하는 사람인가, 이렇게 아이들이 뒤에서 기다리며 지켜보는데 이녁 뭐 하는 사람인가, 하고 부른다. 이때에 부끄럽거나 창피하다고 느끼면 주춤 물러서며 맨 뒤로 간다. 이때에 부끄러움도 창피함도 모르거나 잊은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새치기를 한다.
새치기를 해서 한 발 먼저 타거나 내리면 무엇이 즐거울까. 벼락치기를 해서 점수 1점 더 올리면 무엇이 기쁠까. 남보다 더 이룬 열매란 무엇이 반가울까. 힘이 있으면 두레나 품앗이를 할 때에 즐겁다. 이름이 있으면 이름값으로 사랑을 나누면 기쁘다. 돈이 있으면 이웃한테 오순도순 베풀어 함께 쓰고 함께 누리며 함께 가지면서 아름답다.
지식은 쌓이기 때문에 아름답지 못하다. 쌓일 때에는 지식이요, 쌓이는 지식은 우리 삶에 이바지를 하지 못한다. 슬기는 쌓이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다. 쌓이지 않고 흐르는 슬기요, 흐르는 슬기는 우리 삶을 아름답게 북돋운다. 지식은 쌓여 학벌과 학문이 된다. 슬기는 흘러 사랑과 꿈이 된다. 지식을 쌓으니 인문책 태어나고, 슬기가 흐르니 이야기책 샘솟는다. 4346.10.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