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일꾼한테 미안하지만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일요일 낮에 ‘부산 한국방송’ 사람들한테서 취재를 받기로 했다. 나는 일요일 아침부터 ‘전국 헌책방 책지기 이야기마당’ 자리를 살피고 보듬는 일을 하느라 바쁘다. 곳곳에서 찾아온 헌책방 책지기를 모시고 열 시 즈음부터 함께 다니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분들 말씀을 노트북에 옮기느라 숨돌릴 틈이 없다. 한 시간 즈음 이분들 말씀을 노트북에 옮길 즈음, 커다란 촬영기가 책방에 들어온다. 방송국 사람들 왔구나 하고 느낀다. 그러나 눈도 귀도 마음도 헌책방 책지기 말씀을 한 마디라도 안 놓치려고 자판을 두들긴다. 녹음기 없고 디지털사진기 녹화는 사진기밥 다 떨어지면서 못 쓴다. 손가락과 손목과 어깨와 등허리 결리지만 씩씩하게 참으면서 자판을 두들기고 또 두들긴다. 한참 자판을 두들기는데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저기요.” 하고 부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자판질을 멈출 수 없고 눈도 귀도 마음도 뒤에서 부르는 소리로 갈 수 없다. 1초라도 자판질을 멈추면 ‘흐르는 이야기’가 가뭇없이 사라지는걸. “저 건드리시면 안 돼요. 이분들 말씀 (자판으로 옮겨) 쳐야 해서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어요.” 하고 재빨리 말한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자판질에만 매달리니, 방송국 사람들 토라져서 곧바로 촬영기 챙겨서 밖으로 나간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로서는 꼼짝하지 못한다. 내가 할 일이란 ‘취재받기’보다 ‘말씀 옮기기’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송국 사람들이 나한테 취재를 바라며 연락했을 적에도, 헌책방 책지기 만나서 이분들 말씀 옮기는 동안 다른 어느 일도 할 수 없다고 단단히 얘기했다. ‘전국 헌책방 책지기 이야기마당’을 모두 끝마치고 ‘책 출간기념잔치’ 자리로 옮겨서 취재받기(인터뷰하기)를 하겠다 말했고, 방송국 사람들도 그렇게 하겠노라 했다.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찬찬히 지켜보면서 기다려야 옳은 노릇이다. 한참 바빠 숨돌릴 틈조차 없는 줄 뻔히 바라보면서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된다. 책방을 드나드는 손님들이 왁자지껄 떠드느라 이런 소리에 헌책방 책지기 낮은 목소리가 파묻히기까지 하는데, 왜 말을 걸려 하는가.


  이야기마당을 마친 뒤, 방송국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안 보인다. 굳이 이들한테 전화를 걸지 않는다. 기다릴 줄 모를 뿐 아니라, 헌책방 책지기 입에서 놀랍고 아름다운 생각이 쏟아져나오는데, 이런 이야기를 느긋하게 귀를 기울여 듣지 않은 방송국 사람들하고 무슨 말을 나눌 수 있겠는가.


  방송취재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보수동 헌책방골목으로 취재를 나왔다면, 누구보다도 헌책방 책지기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은 뒤, 이녁 생각을 갈무리해서, 앞으로 헌책방골목과 헌책방과 책방과 책이 어떤 길로 나아갈 적에 아름다운가 하는 대목을 여쭙고 들어야 뜻있고 훌륭한 취재를 마무리짓지 않겠는가.


  내가 방송국 사람들한테 들려줄 말이란 ‘헌책방 책지기’ 목소리일 뿐이다.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 목소리를 하나 얹어서 더 들려줄 뿐이다. 4346.10.2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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