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곳

 


  책이 있는 곳은 책이 없는 곳과 다르다. 어떤 책이 있다 하더라도, 책이 있는 곳은 빛과 무늬와 결이 다르다. 책을 펼쳐서 읽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책 하나 있으면서 고즈넉한 빛과 무늬와 결을 들려준다.


  책은 펼쳐서 읽는 사람한테만 이야기를 건네지 않는다. 책은 펼쳐 읽지 않는 사람한테도 이야기를 건넨다. 책을 펼쳐서 읽는 사람은 종이에 얹힌 줄거리에 따라 이야기를 누린다. 책을 펼치지 않는 사람은 책에 감도는 기운을 마음으로 누린다.


  풀이 있는 곳은 풀이 없는 곳과 다르다. 어떤 풀이 자란다 하더라도, 풀이 있는 곳은 빛과 무늬와 결이 다르다. 풀을 느끼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풀 한 포기 자라면서 푸르며 싱그러운 빛과 무늬와 결을 베푼다.


  풀은 알아보는 사람한테만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풀은 알아보지 않는 사람한테도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준다. 풀을 알아보는 사람은 풀포기에 내려앉은 이슬을 누리고, 풀포기 보드라운 결을 손가락으로 느끼는데, 풀을 못 알아보는 사람은 이녁 스스로 모른다 하더라도 언제나 푸른 숨을 마시면서 푸른 넋을 건사할 수 있다.


  나무가 있는 곳은 나무가 없는 곳과 다르다. 그래, 어떤 나무가 자란다 하더라도, 나무가 있는 곳은 빛과 무늬와 결이 다를밖에 없지. 나무를 사람들이 느끼건 안 느끼건, 나무는 짙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살랑살랑 나뭇잎 춤추는 소리를 속삭인다. 모든 사람이 나무를 알아차리면서 나무그늘 거님길을 지나갈까. 모든 사람이 나무를 헤아리면서 자가용으로 찻길을 달릴까. 모든 사람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아파트나 높은 건물에 깃들어 지낼까. 사람들은 나무를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거나 못 보기 일쑤이지만, 나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언제나 한결같은 매무새로 푸르디푸른 빛과 무늬와 결을 둘레에 퍼뜨린다.


  책이 있는 곳은 책이 없는 곳과 다르다. 사람들이 책을 알아보아도 즐겁고, 사람들이 책을 못 알아보아도 기쁘다. 사람들이 책방마실 한껏 누려도 반갑고, 사람들이 책방마실 아직 못 누려도 달갑다. 책과 책방은 늘 우리 곁에서 맑은 빛과 무늬와 결을 나누어 준다. 사람들이 느끼건 안 느끼건, 사람들이 알아채건 안 알아채건, 사람들이 헤아리건 안 헤아리건, 아름다운 책은 꾸준하게 새로 태어난다. 사랑스러운 책은 새롭게 책방 책시렁에 꽂히며 책손을 기다린다. 즐거운 발걸음으로 책방마실 누리는 사람은 새책방에서나 헌책방에서나 책빛을 가슴 가득 받아안을 수 있다. 책방마실이란 책빛마실인 셈이다. 4346.10.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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