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읽는 책

 


  책이 아름답기에 책 한 권 손에 쥐고서 아름답게 읽을 수 있다. 책에 깃든 줄거리가 아름답기에 책 한 권 손에 들고서 아름답게 읽을 수 있다. 책 꾸밈새나 모양새나 줄거리가 썩 아름답다고 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책을 읽으려는 사람 마음결이 아름답기에, 언제나 어느 책을 마주하더라도 아름답게 읽을 수 있다.


  와타나베 타에코 님 만화책 《바람의 빛》 20권을 읽는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 스미는 이야기를 가만히 헤아린다. 신현림 님 시집 《세기말 블루스》를 마당 평상에 엎드려서 읽는다. 싯말과 싯말 사이에 감도는 이야기를 살핀다. 스웨덴에서 날아온 그림책 《고고와 하얀 아이》를 읽는다. 스웨덴에서도 아이들은 ‘도시’보다 ‘시골’이나 ‘섬’이나 ‘숲’에서 홀가분하게 숨쉬고 뛰놀며 어깨동무하는 삶을 바랄까? 아이와 어른 모두 가슴속에 품는 꿈이 어떤 이야기로 태어나는가를 돌아본다.


  책은 어떻게 해서 책이 될까. 인쇄소에서 척척 찍으면 모두 책이 될까. 책방에 착착 꽂으면 모두 책이라 할 만할까. 도서관에 촘촘 갖추면 모두 두고두고 건사할 책이 될까.


  가을바람이 분다. 여름바람 분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하루아침에 바람결이 바뀐다. 바람내음과 바람맛이 다르다. 햇살에 스미는 결과 내음과 맛도 다르다. 땅속에서 솟는 물내음과 물맛도 다르다. 모두 다른 하루가 흐른다. 아이들은 씩씩하게 자고 일어나면서 새롭게 논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먹을 밥을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차린다.


  달걀말이를 하려고 마당에서 풀을 뜯다가 초피나무 열매가 짙붉게 익는 빛을 느낀다. 고들빼기꽃이 하나둘 시들면서 하얀 눈송이 같은 씨앗으로 바뀌는 모습을 본다. 봄부터 키가 자란 쑥풀에 쑥꽃이 맺으려는 무늬를 본다. 거미줄에 붙들린 매미를 보고, 후박나무 어딘가에 깃들어 시원스레 노래하는 매미 소리를 듣는다.


  낮잠 자는 아이들 곁에서 조그마한 책 하나 집어든다. 지난달 순천 저전동에 있는 헌책방에서 장만한 《김현 예술기행》이다. 이 책을 열 몇 해 앞서도 헌책방에서 알아보고 장만해서 읽은 적 있는데, 지난달에 새삼스레 눈에 뜨이기에 다시금 집어들어 찬찬히 읽어 본다. 스물너덧 살에 읽는 책과 마흔을 코앞에 둔 요맘때에 읽는 책은 서로 어떤 맛이 될까. 앞으로 쉰을 지나고 예순을 가로질러 일흔이 될 적에도 헌책방에서 《김현 예술기행》을 만날 수 있을까. 그때에는 이 조그마한 책을 어떤 눈빛 되어 어떤 마음으로 살포시 집어들어 펼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나던 1975년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무언가 보고 느끼고 배우고 살피고 알아보려 하던 김현이라는 한 사람은 어떤 눈빛을 밝히고 어떤 마음을 북돋아 조그마한 산문책 하나를 내놓았을까.


  저녁부터 아침까지 풀벌레 노래하더니 낮이 되며 조용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멧새 노래가 이어받는다. 이제 슬슬 저녁 차릴 때가 다가온다고 느낀다. 책을 내려놓는다. 낮잠에서 깨어날 아이들 배고파 할 소리를 생각한다. 4346.9.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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