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24] 풀읽기
― 군대 사계청소(시계청소)가 저지른 짓

 


  네 식구 함께 시골집 떠나 도시로 마실을 오면서 새삼스레 느낍니다. 내가 군대에 있을 적에 중대장·대대장·연대장·사단장·군단장 같은 분들께서 우리한테 시킨 짓 ‘사계청소’가 우리를 어떻게 길들이거나 물들였는가를 새삼스레 느낍니다.


  비무장지대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완전무장지대’인 휴전선 철책 둘레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며, 봄날 되고 여름날 맞이하면 날이면 날마다 해야 하는 숱한 ‘사역’ 가운데 하나는 ‘사계청소’였습니다. 한자말로 ‘사계청소’라 했는데, 이를 ‘시계청소’라고도 했습니다. ‘사계’라는 한자말 쓴 하사관, 이를테면 행정보급관은 ‘둘레에 있는 풀과 나무를 없애 멀리까지 잘 보이도록’ 하자는 뜻이요, ‘시계’라는 한자말 쓴 장교, 이를테면 중대장이나 대대장은 ‘보초를 서는 병사들 눈앞이 확 트여 저기 북녘 인민군 병사가 뭘 하는지 잘 보이도록’ 하자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낫, 정글칼, 톱 들을 하나씩 들고 철책 둘레에 섭니다. 백육십 졸개(땅개, 육군 사병)는 한 줄로 서서 풀을 베고 나무를 자릅니다. 눈앞에 보이는 ‘푸른 빛깔’은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그야말로 작은 들풀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뽑고 베고 죽이고 짓밟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 무엇을 하느냐 하면 고엽제를 뿌립니다. 고엽제를 뿌려서 풀이 돋지 못하도록 해요. 고엽제는 맨손으로도 뿌리고, 바가지로도 퍼서 뿌리며, 하이바로도 담아 뿌려요. 철책 둘레에서 풀을 베고 죽이고 없애는 동안, 또 전역을 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 가룻덩어리가 고엽제였다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계청소이든 시계청소이든 막일을 해야 하던 졸개(땅개, 육군 사병)들마다 팔과 다리와 몸에 두드러기가 생기고 피부병 걸린 까닭을 어느 누구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해 동안 뒤탈을 앓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마취제 없이 칼로 생채기를 도려내기도 해야 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전역을 하고 열 몇 해 동안은, 군대에서 사계청소나 시계청소를 하며 고엽제를 쓴 대목이 엿같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즈음,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며 문득 지난날이 떠오르거나 어쩌다가 군대 적 일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있으면, 풀을 미워하고 나무를 몽땅 죽이도록 하는 군대 몸짓이란, 사람들(젊은 사내) 마음속에 아름다운 사랑이나 맑은 꿈이 깃들지 못하도록 하려던 꿍꿍이였구나 싶어요. 군인이란 살인기계이니까, 군인이란 ‘내 이웃이나 동무라 할지라도 적군이라는 자리에 있으면 거침없이 죽이도록 명령을 따라야 하는 졸개’이니까, 군인들 마음속에 푸른 빛깔과 씨앗과 생각이 깃들면 안 된다고 여겼구나 싶어요.


  그런데, 시골집 떠나 인천으로 나들이를 오는 동안, 시외버스가 서울 버스역에 닿고, 서울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인천으로 오면서, 둘레에서 풀이나 나무를 거의 못 봅니다. 서울도 인천도 풀과 나무는 제자리를 못 찾습니다. 부산도 그렇고 대구도 그래요. 광주라고 다를 수 없고, 울산이라고 낫지 않아요. 마산 진해 창원을 마창진으로 엮어 엄청나게 큰 도시로 바꾸었다지만, 마창진이라는 데에 풀숲과 나무숲 얼마나 있는가요.


  풀이 마음껏 자라지 못하는 곳에 사랑이 자라지 못합니다. 나무가 흐드러지게 뿌리내리지 못하는 곳에 꿈이 흐드러지지 못합니다. 꽃이 곱다시 빛나지 못하는 곳에 생각이 곱다시 빛나지 못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 도시는 모두 군대와 같습니다. 회사도 공공기관도 일꾼(사람들)을 군인처럼 다뤄요. 회사원도 공무원도 마치 군인처럼 위계질서와 명령만 받아들여요. 게다가,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마치고 사회에서 일자리 얻으려는 푸름이와 젊은이도 군인과 똑같은 매무새나 넋이 되고 맙니다.


  군대를 가서 여러 해 지내는 일은 얼마나 나라사랑 될까요. 군대에서 이웃사랑 동무사랑 하나도 배우지 않으면서 사람 죽이는 솜씨를 배우는 한편, 풀과 나무와 꽃을 짓밟는 일을 끝없이 할 때에, 어떤 나라사랑 될까요. 풀사랑과 나무사랑과 꽃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나라사랑이나 지구사랑 이룰 수 있을까요.


  가만히 눈을 감다가 눈을 다시 뜹니다. 서울 벗어난 전철이 인천으로 달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풀빛을 찾습니다. 전철역에는 풀포기 하나 없으나, 전철역과 전철역 사이에는 풀포기 제법 있습니다. 골목집 사이사이 우람한 나무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파트 높직한 데에는 아무런 풀포기도 나무도 안 보입니다. 전철은 동인천역에 닿고, 네 식구는 내립니다. 사람들은 쉽게 새치기를 하고, 표를 끊은 뒤 저마다 갈 곳을 찾아갑니다. 동인천역 뒤쪽은 너른터 만든다며 골목집 허물어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벽돌을 깔아 놓았습니다. 나무는 어디에서 자라야 하고 풀은 어디서 돋아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푸른 숨결 마셔야 목숨을 잇는데, 도시에 풀과 나무와 꽃이 제대로 자랄 수 없으면, 사람은 무엇을 마시면서 삶을 일구는지 모르겠습니다. 4346.6.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당신은 어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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