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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ㅣ 창비시선 309
이문숙 지음 / 창비 / 2009년 12월
평점 :
시와 빛깔
[시를 말하는 시 23] 이문숙,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 책이름 :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 글 : 이문숙
- 펴낸곳 : 창비 (2009.12.10.)
- 책값 : 7000원
이문숙 님 시집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창비,2009)을 시외버스에서 읽습니다. 아니, 군내버스에서 먼저 읽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두 아이를 고흥 동백마을 시골집에 두고, 혼자서 조용히 마실을 나오는 길에, 군내버스 기다리는 마을 어귀에서 먼저 읽고,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20분 달리는 길에 더 읽으며, 읍내에서 시외버스 기다리면서 다시 읽다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가는 길에 마저 읽습니다.
시집을 읽는 동안 창밖을 내다보지 않습니다. 시집을 덮을 적에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시집을 읽는 동안 버스 달리는 소리를 느끼지 않지만, 시집을 덮은 뒤에는 버스 달리는 소리가 온몸에 감겨듭니다.
.. 아무데도 소속되지 않고 화장실 청소만 맡은 여자가 바께스를 들고 복도를 지나간다 .. (미확인물체)
시집을 펼치면 싯말을 하나둘 읊습니다. 시집을 덮으면 우리 아이들 떠들며 뒹구는 소리를 듣습니다. 시집을 집으면 마당으로 찾아드는 멧새들 노랫소리를 못 듣습니다. 시집을 내려놓으면 밥 끓는 소리 듣고, 국 끓는 소리 듣습니다.
오월 저무는 끝날 찾아든 비바람 따라 감나무는 감꽃을 한 소쿠리 내놓습니다. 나는 감나무 밑에서 감꽃을 한 소쿠리 줍습니다. 주운 감꽃은 예쁜 접시에 담아 아이들한테 내밉니다. 아이들은 손가락을 쉬잖고 감꽃을 집어서 하나씩 둘씩 입에 넣습니다.
감꽃 떨구는 감나무는 잎사귀가 짙습니다. 이제, 감잎 노란 빛깔은 한 해 지나 이듬해 봄이 되어야 다시 보겠구나. 이제부터 짙푸른 감잎 되어 감알 야물딱지게 익도록 돕겠구나. 감알 야물딱지게 익어도 드센 비바람 찾아들어 감나무 가지 무겁지 않도록 꽤 떨구어 흙을 살찌우겠지. 흙이 살찌면 이 기운을 감나무가 다시 받아, 대롱대롱 달린 감 바알갛게 익도록 북돋우겠지.
.. 국적불명의 ‘본 그랑드’가 동네 빵집을 또 먹어치운다 / 집기를 치워버린 그곳을 들여다보던 내가 움찔한다 .. (라일락 로路 1번지)
우리 집 풀밭에 한 발자국 내밉니다. 한손으로는 풀을 뜯습니다. 한손으로는 소쿠리 들고 풀을 담습니다. 이윽고 두 손으로 소쿠리 들고 부엌으로 갑니다. 한손으로 물을 틀고 한손으로 풀을 헹굽니다. 두 손으로 물기 탁탁 텁니다. 두 손으로 도마질 하고, 두 손으로 밥과 국을 짓습니다. 한손으로 행주 집어 밥상을 닦습니다. 두 손으로 아이들 밥그릇과 국그릇 내려놓습니다. 한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두 손으로 기지개를 켭니다. 얘들아 밥 먹자.
한손으로는 국그릇 들고, 한손으로는 숟가락 듭니다. 작은아이 국을 떠서 먹입니다. 삼십 분 남짓 밥을 누립니다. 날마다 천천히 자라는 작은아이는 이제 조그마한 풀을 냠냠짭짭 씹어먹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 살쯤 더 자라면, 작은아이도 스스로 풀을 쥐어 얼마든지 씹어먹겠지요.
풀을 먹으며 손가락에 풀물 들고, 입가에 풀빛 어리며, 온몸에 풀내음 번집니다.
.. 당신 / 구름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얼마나 좋았나요 / 꿈 같아서 / 구름을 껴안고 혼자 슬며시 웃기도 했나요 .. (권태로운 손가락)
삶은 어떤 빛깔일까요. 시는 어떤 빛깔인가요. 삶은 어떤 사랑빛으로 일구는가요. 시는 어떤 사랑빛으로 물들이는가요.
내가 이녁한테 한 발자국 다가섭니다. 이녁은 나한테 한 발자국 다가옵니다. 서로 마주하면서 눈웃음 빙그레 주고받습니다. 눈빛이 맑고, 마음빛이 고우며, 생각빛이 포근합니다.
손을 잡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빛이 파랗습니다. 저 파란 하늘 빛깔은 ‘하늘빛’ 한 마디로만 나타낼 수 있겠지요. 하늘이니 하늘빛입니다. 바다는 바다빛입니다. 해는 햇빛이요 달은 달빛이에요.
사람은 사람빛이지요. 풀은 풀빛입니다. 나무는 나무빛이요, 물은 물빛이에요. 저마다 제 빛을 건사합니다. 저마다 제 꿈을 키웁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빛을 보듬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사진빛을 가꿉니다. 그림쟁이는 그림빛을, 노래꾼은 노래빛을 나누어요. 이리하여,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은, 시골빛이랑 흙빛을 사랑합니다.
.. 소라는 하늘이라는 일본말, / 그 말을 듣자마자 홍대를 나온 나의 옛 미술 선생님 / 하늘색, 살색은 잘못된 / 색이름이라고 고집을 피운다 / 그러나 지금도 아이들은 하늘을 푸르뎅뎅 시퍼렇게 칠한다 .. (소라)
시는 무지개빛일 수 있습니다. 무지개빛은 무지개빛대로 곱습니다. 시는 까망과 하양이 섞인 빛일 수 있습니다. 까망과 하양 둘 뿐이라 하더라도 까망하양은 까망하양대로 곱습니다.
노랑이 빨강보다 곱지 않습니다. 파랑이 풀빛보다 곱지 않습니다. 저마다 고운 빛깔이요, 서로서로 다른 빛깔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 일구며 아름다운 온누리는, 다 다른 시가 다 다른 빛깔로 춤추고 흐르기에 아름답습니다. 4346.5.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