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가볍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라는 데에 찾아간다. 교보문고라는 데에서 책을 사려고 찾아가지는 않는다. 누군가 만나려고 이곳으로 간다.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린다. 시청역 땅밑길 걷다가 바깥으로 나온다. 무슨 큰문 앞에서 해고노동자 보듬는 모임이 있고, 전투경찰이 둘레에 쫙 깔린다. 사람들과 자동차들 북적거린다. 사람들 소리와 자동차들 소리로 귀가 따갑다. 귀와 눈을 맑게 열고 싶어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책을 읽으면서 걷는다. 조선일보사 앞을 지나간다. 동아일보사 건너편을 지나간다. 사람들 물결 옆으로 비껴서서 걷는다. 땅밑으로 다시 들어가서 교보문고에 닿는다. 커다란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니 어마어마한 소리가 훅 끼친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장사도 잘 될 테고 전국에 교보문고 지점을 열 만하겠다고 느낀다. 그나저나, 이렇게 시끄럽고 복닥거리는 북새통에서 무슨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이곳에 나들이 오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리구덩이에서도 마음닦기를 하면서 책읽기에 빠져들 수 있을까. 모두들 마음닦기 하듯이 책읽기를 하려나.


  시끄러운 소리구덩이에서는 어떤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복닥거리는 북새통에서는 어떤 책을 눈여겨볼 수 있을까. 넘치는 사람물결 사이에서 어떤 책을 살피면서 어떤 책을 고를 만할까.


  내 어린 날 동네책방을 떠올린다. 내 젊은 날 인문사회과학책방을 떠올린다. 동네책방과 인문사회과학책방은 호젓하고 조용했다. 동네책방으로 들어서면, 바깥에서 듣던 숱한 시끌벅적한 소리가 모두 잠들었다. 차분하게 이 책 저 책 살피고, 느긋하게 내 마음 사로잡는 책을 돌아보았다.


  교보문고에서 사람을 만나 함께 밖으로 나온다. 교보문고 바깥도 시끄럽다. 서울은 온통 소리투성이로구나. 자동차 다니는 소리, 사람들 물결치는 소리, 가게에서 떠드는 소리, 건물마다 웅웅거리는 소리, ……. 바람소리는 없다. 햇볕소리도 없다. 풀소리나 꽃소리나 나무소리도 없다. 나비나 벌이나 벌레나 제비나 멧새나 개구리가 들려주는 소리도 없다. 사람들은 어떤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책을 읽을까. 사람들은 어떤 빛깔을 바라보면서 어떤 책을 만날까.


  책이 가벼워진다.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가벼워지는 책이 아니라, 알맹이가 사라진 채 책이 가벼워진다. 사람들이 가벼워진다. 주머니에서 권력과 돈과 이름값을 내려놓아서 가벼워지는 몸이 아니라, 마음과 사랑과 꿈을 내려놓는 바람에 가벼워진다. 글이 가벼워진다. 겉치레와 껍데기와 눈가림을 훌훌 털기에 가벼운 글이 아니라, 이야기와 삶과 웃음꽃을 담지 않아 가벼운 글이다. (4346.5.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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