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감옥 문학과지성 시인선 209
이경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시와 춤
[시를 말하는 시 14] 이경임, 《부드러운 감옥》

 


- 책이름 : 부드러운 감옥
- 글 : 이경임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1998.2.20.)
- 책값 : 5000원

 


  여섯 살 큰아이가 노래를 부르니, 세 살 작은아이가 춤을 춥니다. 큰아이는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작은아이는 즐겁게 춤을 춥니다.


  큰아이는 노래를 따로 배우지 않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면 곁에서 가만히 듣다가 하나하나 받아들입니다. 작은아이는 춤을 따로 배우지 않습니다. 누나가 보여주는 몸짓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받아들입니다. 작은아이 깜냥껏 몸을 움직이거나 놀리며 춤을 즐깁니다.


  스스로 우러나와 즐기는 춤입니다. 마음속에서 샘솟아 활짝 웃으며 누리는 춤입니다.


.. 그렇다면, 나는 왜 아직도 이곳을 서성이는 걸까 / 아직 살해하지 못한 말들이 내게 남아 있단 말인가 ..  (니느웨를 걷는 낙타)


  어른도 아이도, 저마다 이녁 숨결 사랑하면서 홀가분히 춤을 추어요. 저마다 이녁 춤사위가 고스란히 노래 되어 싯말 하나로 영글어요. 오래도록 땀흘리며 가락에 맞추어 춤사위 선보일 수 있겠지요. 춤패 춤벗하고 춤사위 한껏 꽃피울 수 있겠지요.


  어떻게 추든 춤은 춤입니다. 어떻게 쓰든 글은 글입니다. 문예창작학과를 다녀야 글을 잘 쓰지 않듯, 어떤 이한테서 따로 배워야 춤을 잘 추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길 때에 춤이요, 글입니다. 스스로 누릴 때에 춤이고, 글이에요.


  즐겁게 먹으려고 밥을 차려요. 즐겁게 읽으려고 글을 써요. 즐겁게 함께하려고 춤을 춰요.


  솜씨자랑이나 재롱놀이라 한다면, 아이들 춤사위는 재미없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저마다 스스로 즐기는 춤이기에 즐겁습니다. 1등을 뽑으려 하는 춤이 아니고, 겨루듯이 부대끼는 춤이 아닙니다.


..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삶을 살지 못한다 / 그렇다고 리모컨을 눌러대고 있는 / 이 삶을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  (리모컨 누르는 여자)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날립니다. 바람결 따라 머리카락이 춤을 춥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 흔들리고 나뭇잎 떨립니다. 바람결에 맞추어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춤을 춥니다. 바람이 불어 꽃잎 파르르 움직입니다. 봄날 봄꽃은 봄바람하고 어울리며 봄춤을 춥니다. 여름날 여름꽃은 여름바람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여름춤을 춥니다.


  그러고 보면, 바람사위는 춤사위로구나 싶어요. 바람결은 춤결이 되는구나 싶어요. 바람내음은 춤내음이 되고, 바람빛은 춤빛이 될 테지요.


.. 나의 유일한 유희는 언제나 나 자신인 것이다 ..  (달팽이는 시들지 않는다)


  아침바람 쐬면서 아침을 맞이합니다. 동트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낮바람 쐬면서 낮을 누립니다. 환하게 밝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새삼스레 파란 빛깔을 생각합니다. 저녁바람 쐬면서 저녁을 노래합니다. 천천히 저물며 보라빛에서 검은빛으로 바뀌는 하늘빛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면서 별이 빛납니다. 별이 빛나며 하늘은 더 까맣게 물들고, 하늘이 까맣게 물들수록 밤바람은 고즈넉하게 마을을 감돕니다.


.. 거리에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은 따뜻한 새알 같다 ..  (부드러운 감옥)


  이경임 님 시집 《부드러운 감옥》(문학과지성사,1988)을 읽는 시골마을 이른아침에 들새가 속닥속닥 지저귑니다. 봄빛이 가득 물들고, 봄비가 들판 적시며, 봄새가 노래로 하루를 엽니다. 봄빛은 봄이 베푸는 춤사위와 같고, 봄비는 봄을 반기는 춤노래와 같으며, 봄새는 봄을 즐기는 봄동무와 같습니다.


  이경임 님은 “부드러운 감옥”을 시로 노래하는데, 왜 부드러운 감옥을 노래해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차가운 감옥이나 메마른 감옥 아닌 부드러운 감옥입니다. 부드러운 품이나 부드러운 들판 아닌 부드러운 감옥입니다. 서울살이란 감옥이되 부드러운 감옥일까요. 가끔 서울을 벗어나 시골을 맛보며 바람을 쐬는 나들이는 다시 돌아가야 하는 감옥을 떠올리는 부드러운 굴레일까요.


  스스로 부드러운 감옥에 머물기에 부드러운 감옥을 이야기할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부드러운 감옥에 깃들기에 부드러운 감옥을 노래하고 춤추다가는 글로 빚을밖에 없습니다.


.. 굴비 두름처럼 집들이 엮여져 있는 길을 벗어난다 한 개의 잎새도 매달려 있지 않은 나목들이 서 있다 나목들은 하얗게 부풀어오른다 골목이 지워지고 해장국집이 지워지고 야근이 지워지고 아내가 지워지고 신문사가 지워진다 바람이 분다 ..  (겨울 산행)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으면 아름다움이 환하게 빛나며 눈앞에 나타납니다. 따스함을 가슴에 품으면 따스함이 맑게 빛나며 우리 곁에 나타납니다. 사랑도 내가 부르고, 미움도 내가 부릅니다. 꿈도 내가 부르고 낭떠러지도 내가 부릅니다. 나는 무엇을 부르면서 내 삶을 누리는 사람이 될까요. 나는 누구하고 어떤 삶을 빚으며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짓는 사람이 될까요.


  이 나라에 따스하고 포근한 손길이 늘어나기를 빕니다. 이 마을에 넉넉하고 살가운 눈길이 자라나기를 빕니다. 4346.3.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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