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읽는 사람들

 


  전남 고흥에서 충북 음성으로 오기까지 여덟 시간 십육 분. 이오덕학교에 들러 이정우 님과 이야기를 나누고서 무극 버스역으로 와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한 시간 이십 분.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한 시간 반. 멀고 먼 길을 달리면서 몸이 고단하지만 책 네 권을 읽는다. 몸이 고단하다는 생각을 잊고자 책을 읽는다고 할까. 아니,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책에 파묻힌다고 할까. 열 시간 넘는 길을 버스와 기차와 버스와 또 버스에 버스와 마지막으로 전철을 타는 동안 손에 책을 쥐면서, 도시에서 샘솟는 온갖 자질구레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안 들을 수 있다. 또한, 내 생각을 스스로 가다듬을 수 있다.


  서울에서 2호선 전철을 타고 달리다가 신도림역에서 국철로 갈아탄다. 전철 칸에 오르니 새벽 일찍 집을 나서며 서울로 일하러 왔다가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가는 지친 사람들 모습이 한가득. 그래도 밤전철이 아닌 만큼 사람들 낯빛이 이럭저럭 맑다. 더구나, 종이책 손에 쥔 사람 꽤 많다.


  그렇겠지. 저녁 아홉 시 언저리에 신도림을 지나 인천으로 전철을 타고 달리는 이들은 회사를 마치자마자 다른 데에 안 들르고 맨 마음으로 집으로 갈 테니까, 이렇게 맑은 얼굴이 되고 손에도 종이책을 쥘 만하리라.


  시골에서 도시로 마실을 오며 짐보퉁이 잔뜩 꾸린 할머니와 할아버지 말고, 맑으며 웃는 얼굴을 참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는 모르나,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 종이책 손에 쥔 사람들한테서 따순 기운이 흘러나온다. 좋다. 4346.1.3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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