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 도서정가제

 


  피카소 그림을 바라보면서 참 즐겁네, 하고 느낀 사람 가운데 누군가 피카소 그림 한 닢 갖고 싶다 꿈을 꿉니다. 그래서 피카소 그림 한 닢을 장만하는 데에 들 돈을 푼푼이 모읍니다. 이윽고, 한 해 뒤일는지 열 해 뒤일는지, 또는 아이들한테까지 이어지며 백 해나 이백 해 뒤일는지, 스스로 꿈꾸던 즐거움을 빛내는 그림 한 닢이기에, 에누리 없이 제값을 치르면서 피카소 그림을 장만합니다.


  숲이 춤을 추고 새들이 노래하는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식구들과 늘 예쁜 웃음을 꽃피우면서 아이들이 앞으로도 예쁜 이야기 길어올릴 보금자리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땅 장만할 돈을 모읍니다. 한 해 뒤일는지 열 해 뒤일는지, 또는 아이들한테까지 이어지며 백 해나 이백 해 뒤일는지, 식구들 모두 꿈꾸던 즐거움을 빛내는 숲자락 깃든 시골땅을 장만합니다.


  책방마실을 하다가 눈을 번쩍 뜹니다. 마음이 환하게 열립니다. 아, 책이로구나. 참다운 슬기와 착한 꿈과 고운 이야기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책이로구나. 책방에 서서 기쁘게 읽습니다. 어느새 책 한 권 훌쩍 읽고는, 셈대로 들고 가서 값을 치릅니다. 이 책 한 권 쓴 사람 넋과 이 책 한 권 엮은 사람 손길을 생각합니다. 이 책 하나 꽂히기에 책방이 눈부시게 밝은 무지개로구나 싶습니다.


  그림값은 꿈값입니다. 땅값은 삶값입니다. 책값은 사랑값입니다. 꿈은 값으로 매기지 못합니다. 삶은 값으로 사고팔지 못합니다. 사랑은 값으로 따지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이야기 있을 때에, 그림이요 땅이며 책입니다.


  책방마실을 하다가 책 하나 읽으려 하는데, 책값이 비싸다고 느낀다면, 그 책은 아직 내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은 책입니다. 또는, 그 아름다운 책을 맞이할 내 마음그릇이 무르익지 않아, 애써 이 책을 장만해 본들 내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책값을 에누리할 수 없습니다. 더 싸게도 더 비싸게도 장만할 수 없습니다. 책마다 붙은 제값에 장만합니다. 나는 이야기를 읽는 사람이기에, 책에 어린 이야기가 사랑스럽다면,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읽고 싶어 값을 치릅니다. 땅을 일구며 품을 들이듯, 책을 장만하며 값을 들입니다. 냇물 마시고 바람 들이켜면서 내 숨결 얼크러지듯, 내 보배로운 겨를을 들여 책을 읽습니다.


  흥정하는 맛에 물건을 사고파는 저잣거리라 하니까, 책방이 저잣거리와 같다면, 이야기 한 자락 사고파는 값을 흥정할 만하겠지요. 이 책은 얼마 저 책은 얼마, 하는 투로 흥정을 할 만하겠지요. 갓 나온 책이니 얼마, 조금 묵은 책이니 얼마, 하는 양으로 흥정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꼭 장만해야 하는 산삼이라든지 연장이라든지 집살림이라면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흥정하지 못합니다. 집을 지으면서 숲에서 나무를 벨 적에 나무값 흥정하는 사람 없습니다. 나무를 만지는 나무장이한테 품삯을 흥정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빗물값을 흥정하는 흙일꾼 없습니다. 하늘을 섬기며 햇볕값을 흥정하는 흙일꾼 또한 없습니다.


  사람들이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값을 흥정하려 한다면, 그이는 ‘굳이 안 읽어도 될 책’을 ‘내 것이라는 물건으로 가지고’ 싶기 때문이로구나 싶습니다. ‘물건 소유욕’이 아니고서야, 책값을 흥정할 일이 없습니다.


  삶을 빛내고 사랑을 살찌우는 책 하나라 한다면, 책값을 즐겁게 치를 수 있도록 푼푼이 돈을 모아 장만해야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살아갈 사람입니다. 우리는 ‘물건 소유욕’을 키울 장사꾼이 아닙니다. 장사꾼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무언가 가지고 싶으면 가질 노릇입니다. 그러나, ‘물건 소유욕’을 앞세우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책읽기’를 가로막거나 그르치지 않기를 빕니다.


  책이 될 글을 쓰는 사람은 ‘책이 나오고 한 해 지나고 나면 10% 더 에누리해도 될 만한 값어치’인 글을 쓰지 않습니다. 책이 될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한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백 해 뒤이든, 또 아이들 뒤를 잇고 잇는 먼먼 뒷날까지, 온누리 환하게 밝힐 글을 씁니다.


  글을 책으로 엮는 사람은 ‘책을 펴내고 한 해 지나고 나면 10% 더 에누리해서 팔 만한 값어치’인 책을 엮지 않습니다. 책을 펴내는 사람은 누구나, 한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백 해 뒤이든, 또 아이들 뒤를 잇고 잇는 먼먼 앞날까지, 온누리 눈부시게 빛낼 책을 펴냅니다.


  글을 쓰는 사람, 책을 엮는 사람, 책을 사고파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이들 모두 아름다운 꿈과 사랑과 이야기를 따사롭게 보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6.1.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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