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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벽 3 - 변화의 물결
이시카와 다쓰조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1년 3월
평점 :
아이들을 서울로만 보내는 어른들
[시골사람 책읽기 004] 이시카와 다쓰조, 《인간의 벽 (3)》(양철북,2011)
이원수 님이 쓴 동시 〈자두〉를 읽으면 “자두밭에 가면 달큼한 자두 냄새” 하고 첫머리를 엽니다. 더없이 마땅한 소리이지만, 이 마땅한 소리를 어린이시로든 어른시로든 쓰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자두밭에 가니 자두 냄새가 날 텐데, 이 마땅한 이야기를 시로도 소설로도 쓰지 못해요.
겨울날 멸치를 말리는 바닷마을에 간다면 멸치 냄새가 널리 퍼지겠지요. 가을날 나락을 베어 말리는 시골마을 고샅에 서면 나락 냄새가 골고루 퍼질 테고요. 그런데, 멸치나 나락에서 풍기는 고소하며 흐뭇한 냄새를 노래하는 시인이나 소설가는 아주 드뭅니다. 멸치나 나락 냄새를 노래하는 가수는 몇이나 될까요. 아니, 있기나 할까요.
아이들과 하루 스물네 시간을 붙어서 지내면 아이들 목소리를 스물네 시간 듣습니다.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놀리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하노라면, 아이들 살내음을 스물네 시간 맡습니다. 이원수 님이 〈자두〉라는 동시를 써서 “자두 냄새”를 노랬다면, 나는 ‘아이’라는 동시를 써서 “아이 냄새”를 노래할 만합니다. 참말, 아이들 자장노래를 부르는 깊은 밤에 “착한 아이 예쁜 아이” 소리를 끝없이 되풀이합니다.
2012년에 다섯 살 두 살인 아이들은 2013년을 맞이하면 여섯 살 세 살이 됩니다. 큰아이는 이제껏 보육원이건 어린이집이건 유치원이건 안 다닙니다. 어버이 두 사람이 이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맡기고 싶지 않으니 안 보냅니다. 아이들이 받아야 할 것이라면 ‘교육’과 ‘훈육’이 아닌 ‘사랑’과 ‘믿음’이라고 느껴요. 아이들은 ‘영양’을 먹지 않아요. 아이들은 사랑 담긴 ‘밥’을 먹어요.
참 많은 어버이들은 아이들한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베푼다면서 서울로 가려 합니다. 서울로 가면, 서울에서도 강아랫마을로 가려 합니다. 또 강아랫마을에서도 어느 학군에 들어가려고 용을 씁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지나치게 모여 지나치게 시끌벅적한 서울에서 지내는 어버이와 아이는 즐거울까요? 한 해에 거의 천만 원쯤 들여 유치원에 보내는 서울마을 어버이는 즐거운 ‘교육’을 아이한테 베풀까요? ‘더 나은 교육 환경’이라는 데에서 유치원을 다니는 서울마을 아이는 즐거운 ‘삶’을 누릴까요?
.. 점수가 떨어졌으면 떨어진 만큼 성적으로 환산해 버리면 되는 것인지, 또 점수보다는 더 실력이 있었을 텐데 점수가 안 나온 학생에게 오직 점수만으로 성적을 평가해도 괜찮은 것인지 …… 성적표를 받고 나서 성적이 떨어진 아이와 그 부모들이 실망할 것을 생각하면 성적을 평가하는 것이 크나큰 죄악처럼 생각된다. 한 아이의 지식과 재능, 성격, 품행을 두고 ‘너는 이만큼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다.’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런 불순한 행위가 허용되어도 괜찮을 것일까 .. (3권 25쪽)
나는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맹자 어머니’를 배웠습니다. 흔히 어려운 한자말로 ‘맹모삼천지교’라 읊지만, 나는 그저 ‘맹자 엄마 얘기’로 떠올립니다. 맹자를 낳아 돌본 어머니는 ‘아이가 지내기에 가장 좋은 터’를 찾아 집을 옮깁니다. 세 차례 옮긴다지요.
맹자 어머니는 어디에 집을 마련할까요. 맹자 어머니는 어떠한 곳이 가장 좋은 터라고 여길까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버이들은 틈틈이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옵’니다. 아이들이 ‘자연과 생태를 맛보’도록 하려고 애를 씁니다. 적어도 주말이면 공원에라도 가려고 애를 씁니다. 동물원을 찾아가 동물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도시에서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마 ‘아이들이 미치’고 말리라 생각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과 아이는 틈틈이 ‘시골마을 숲’으로 찾아가서 한숨을 돌리며 맑고 푸른 바람을 마시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는지 몰라요.
거꾸로 시골마을 삶을 떠올려 봅니다. 시골마을 아이들은 시골에서 지내며 숨이 막혀 죽을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시골에서 지내며 답답하거나 갑갑해서 미칠까요?
.. 부모들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내 자식만 안전하게 교육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콩나물 교실도 고통스럽지 않다. 교사가 부족해 선생들이 과로로 결핵에 걸려도 어머니들은 관심이 없다. 글쓰기 대회는 1년에 한 번뿐이지만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다는 것을 어머니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 하지만 근본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는 교사들의 투쟁에는 ‘선생들이 학교를 쉬고 파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해 버린다 .. (3권 237쪽)
오늘날 한국을 살펴보면, 어느 시골마을이든 지자체에서 ‘아이들한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베푼다고 하면서 하는 일이란 고작 ‘서울에서 이름난 학원 강사를 큰돈 들여 부른 다음 입시공부 시키는 짓’에서 머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시험성적 잘 나온 몇몇 아이들을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 같은 데로 영어 연수 보내 주기’쯤 해 줍니다.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시골아이가 시골아이답지 않게 크도록 밀어붙이는 꼴입니다. 시골아이가 도시아이로 바뀌도록 닦달하는 꼴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기쁨과 보람과 재미를 잃어버리도록 내모는 꼴입니다.
도시아이들은 바다도 모르고 숲도 모릅니다. 도시아이들은 갯벌도 모르고 들판도 모릅니다. 도시아이들은 나락도 모르고 마늘도 모릅니다. 도시아이들은 바지락도 모르고 갑오징어도 모릅니다. 도시아이들은 쭈꾸미도 모르고 전어도 모릅니다.
시골마을 고흥아이는 무엇을 알까요. 시골마을 고흥아이는 무엇을 누리는가요. 고흥에서 나고 자라며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보고 들으며 배우는가요. 시골마을 고흥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분은 아이들 앞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며 가르치는가요.
서울에서 고흥으로 찾아온 도시내기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를 가릴 줄 모릅니다. 그런데, 고흥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가운데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어떻게 다른가를 가릴 줄 아는지 궁금해요.
잎이 모두 떨어진 감나무와 유자나무와 탱자나무와 석류나무와 매화나무 앞에 서서, 앙상한 나뭇줄기만 보면서도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 줄 알아볼 고흥아이는 몇이나 될까 궁금해요. 아니, 아이에 앞서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고흥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어른들은 ‘겨울날 앙상한 나뭇줄기’를 살살 어루만지며 ‘너 참 씩씩하게 겨울을 잘 나는구나.’ 하고 노래할 수 있는지요.
.. 민들레의 흰 씨가 날아간다. 도랑에서 송사리가 헤엄친다. 황매화 나무의 노란꽃, 보랏빛을 띤 제비꽃. 보수파도 없고 개혁파도 없다. 소란을 떠는 이들은 어른뿐이다. 아이들 세계에는 일교조도 없고 문부성도 없다 .. (3권 426쪽)
일본사람 이시카와 다쓰조 님은 1950년대 일본 교육밭 이야기를 《인간의 벽》이라는 소설책 세 권으로 갈무리했습니다. 관료주의에 물들고 찌든 교육부(문부성)에서 아이들을 오직 숫자(성적)로만 옭아매며 바보처럼 길들이려 하는 모습을 《인간의 벽》 세 권을 읽으며 하나하나 느낍니다. 그런데, 1950년대 일본 교육밭 이야기라고 하나, 어째 1990년대 한국 교육밭하고 똑같으며 2010년대 한국 교육밭하고도 똑같습니다. 앞으로 2030년대나 2050년대 한국 교육밭은 어떻게 될는지요. 아니, 2030년쯤 되면 시골마을 고흥에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한 군데라도 남아날까 궁금합니다. 2020년만 되어도 고흥군 면소재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는 몽땅 문을 닫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죄 서울로만 보내려는 교육정책인걸요. 허울로는 ‘지붕없는 미술관’이지만, 막상 시골마을 고흥아이는 고흥이 얼마나 ‘지붕없는 미술관’인 줄 못 느끼는걸요. 기숙사에 틀어박혀 시험공부만 하느라 바쁜걸요. ‘지붕없는 미술관’을 누리거나 돌아볼 겨를이 없는걸요. 주말에는 ‘서울에서 찾아온 입시학원 강사’한테서 ‘대학입시 특강’을 받느라 부산한걸요.
고흥아이는 서울아이가 되어야 아름다울까요. 고흥아이는 고흥아이로 살아가면 불쌍하거나 안쓰러운가요. 숲이 아름다운 고흥에 ‘숲학교’가 없어요. 바다가 예쁜 고흥에 ‘바다학교’가 없어요. 들이 어여쁜 고흥에 ‘들학교’가 없어요. 온통 입시학교만 있고 방과후교실만 있으며 입시특강만 판쳐요. 고흥아이는 어디에서 숨을 쉬면서 숨통을 틀어야 할까요. 고흥아이는 푸른 숨결을 어떻게 건사해야 할까요. (4345.11.19.달.ㅎㄲㅅㄱ)
― 인간의 벽 1∼3 (이시카와 다쓰조 씀,김욱 옮김,양철북 펴냄,2011.3.30./권마다 14000원)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