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바람

 


  들바람 부는 들판에 섭니다. 나는 들바람을 마시고 싶어 들 앞에 섭니다. 거세거나 드세거나 모질다 하는 커다란 비바람이 들을 휘젓습니다. 어디에서는 지붕을 날리고 비닐집을 뜯는다 하는데, 어디에서는 자동차도 날리고 멧자락을 무너뜨리기도 한다는데, 나는 이 들바람이 볏포기를 눕히거나 꺾지는 못하고, 그저 벼춤을 추도록 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바다에서는 파란 물결이 일렁입니다. 들판에서는 푸른 물결이 일렁입니다. 큰 비바람이 한 차례 훑으며 볏포기를 이리저리 흔들어 춤추도록 하니까, 볏포기한테 달라붙어 볏포기를 갉아먹는 벌레를 떨굴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외할머니나 외삼촌 이야기가 얼핏 떠오릅니다. 충청남도 시골마을 어르신들은 ‘태풍이 한두 차례 지나가야 벼가 잘 익는다’고 했어요. 태풍이 안 훑는 논은 벌레가 많이 들어 힘들다고 했어요.


  요즈음에는 태풍이 한두 차례 찾아와서 스윽 훑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들판에 풀약을 치면서 태풍을 반기지 않습니다. 태풍이 아니더라도 조금 거세거나 드센 바람이 불어도 모두들 못마땅해 합니다.


  나는 바람을 더 좋아하지 않으나 바람을 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바람을 못마땅해 하지 않으며, 바람더러 어서 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기에, 부는 바람을 쐬면서 들판에 섭니다. 바람이 멎기에, 고요한 저녁을 가로지르는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들바람 불어 푸르게 푸르게 푸르게 노래하는 들판을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4345.8.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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