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ㄱㅎ’와 ‘PGH’
[말사랑·글꽃·삶빛 25] 한국사람이 쓰는 이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던 1992년부터 내 이름을 ‘ㅊㅈㄱ’처럼 적었습니다. 동무들 이름은 ‘ㄱㅎㅅ’이나 ‘ㅈㄱㅎ’나 ‘ㄱㅅㅌ’처럼 적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던 때까지는 알파벳으로 ‘CJG’처럼 적기도 했지만, 나와 동무들 이름을 한글 닿소리를 따서 적을 때에 한결 즐거우면서 보기에 좋다고 느꼈어요. 때때로 학과목 이름 ‘국어’를 ‘ㄱㅇ’로 적고, ‘영어’를 ‘ㅇㅇ’로 적기도 합니다. ‘생물’은 ‘ㅅㅁ’로 적고, ‘물리’는 ‘ㅁㄹ’로 적어 봅니다. 사람들이 안 써 버릇해서 그렇지, 이렇게 한두 차례 적고 보면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어요. 그래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다른 이들은 ‘SKY’라 말하지만, 나와 내 가까운 동무들은 ‘ㅅㄱㅇ’이라 말했어요. 적기로는 한글 닿소리를 따서 ‘ㅅㄱㅇ’이라 적고, 말할 때에는 ‘서고연’이라 말했어요.
따로 한글사랑이 깊거나 넓었기에 ‘ㅊㅈㄱ’를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주고받는 한국사람이기에 아주 홀가분하게 한글 닿소리로 내 이름을 적을 뿐이었어요.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이니셜’을 쓴다면, 한글을 쓰는 나라에서는 ‘앞글’을 쓴다고 할까요.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러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며 나섭니다. 나는 이 후보도 저 후보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해서 나라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하든 나 스스로 내 보금자리에서 내 삶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일구면서 누릴 때에 내 마을과 내 나라 또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느낍니다. 내가 할 일이라면 아이들과 맑은 눈빛으로 맑은 생각을 나누는 일이라고 느껴요. 마음을 맑게 다스리고, 삶을 맑게 빛내며, 사랑을 맑게 꽃피우면, 이 기운이 차츰 퍼지면서 온누리를 따사로이 보듬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그나저나, 올 대통령선고를 둘러싸고 어느 정당 후보 한 사람 이야기가 곧잘 도마에 오르는 듯합니다. 이이는 ‘ㅂㄱㅎ’라는 한글 닿소리로 이녁 이름을 적바림하면서 스스로를 널리 알리려 합니다. 이제까지 여러 대통령 후보, 또는 정치꾼은 으레 알파벳 앞글을 딴 ‘YS’이니 ‘DJ’이니 ‘JP’이니 ‘MB’이니 하면서 적바림하곤 했는데, ‘GH’ 아닌 ‘ㄱㅎ’라는 한글 이름을 써요.
‘ㅂㄱㅎ’를 쓰는 이분이 한글과 한국말을 널리 사랑하거나 깊이 아끼기에 이처럼 한글 닿소리를 딴 이름을 쓰는지, 대통령선거에서 사람들한테 당신 이름을 두루 알리고 싶은 생각 때문에 한글 닿소리를 딴 이름을 새삼스레 내세우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글 닿소리를 딴 이름 적기는 새롭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이름을 적으니까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한글에 담아서 나타내는 겨레이니까, 대통령 후보이든 아니든, 소설쟁이가 되든 대학교수가 되든, 또 여느 흙일꾼이나 어버이가 되든, 누구나 한글 닿소리로 이름을 적을 만해요. 곰곰이 따지고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이름을 적을 때에 으레 알파벳으로 적어 버릇할 뿐이에요.
‘ㅂㄱㅎ’를 쓰는 이분이 ‘ㅂㄱㅎ’처럼 적바림하기에 한결 널리 당신 이름을 알릴 수 있으리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이분 스스로 이러한 이름을 쓰면서 당신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깊으면, 차츰 이 이름을 알릴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정치꾼 한 사람 말씀씀이를 돌아보건대 한글사랑이 더 깊지 않은 셈이요, 정치꾼 한 사람 몸짓을 살피건대 홍보하는 효과가 더 크지 않은 셈이요.
그러나, 나는 생각합니다. ‘ㅂㄱㅎ’처럼 이름을 쓰는 이분 모습을 바라보면서, 신문기자이든 방송기자이든, 다른 정치꾼을 가리키는 자리에 이제부터는 ‘YS’ 아닌 ‘ㄱㅇㅅ’이나 ‘ㅇㅅ’처럼 적바림할 만해요. 굳이 ‘DJ’를 써야 할 까닭 없이 ‘ㄱㄷㅈ’이나 ‘ㄷㅈ’처럼 적바림해도 좋아요. 왜 ‘MB’라고만 적어야 할까요. ‘ㅇㅁㅂ’이나 ‘ㅁㅂ’처럼 적바림하면 돼요. 우리들은 ‘ㅇㅊㅅ’나 ‘ㅁㅈㅇ’처럼 사람이름을 적바림하면서 이분들을 떠올리면 즐겁습니다. ‘ㅂㄱㅎ’라고 이녁 이름을 적바림한 분 때문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라면 으레 이런 한글 닿소리 쓰기를 하면서 이녁 이름을 예쁘게 사랑하는 길이 있는 줄 예쁘게 느낄 수 있으면 흐뭇해요.
나는 내 이름을 적바림하는 자리에 ‘ㅊㅈㄱ’라고도 적지만, 내 글이름인 ‘함께살기’를 간추려 ‘ㅎㄲㅅㄱ’처럼 적기도 합니다. 2012년에 서른여덟 살인데요, 나는 그동안 스무 해째 이렇게 내 이름을 적습니다. 우리 집 큰아이 이름 ‘사름벼리’는 ‘ㅅㄹㅂㄹ’로 적고, 작은아이 이름 ‘산들보라’는 ‘ㅅㄷㅂㄹ’로 적습니다. 이름을 즐겁게 생각하며 한글 닿소리로 즐겁게 적습니다. 이름을 곱게 읊으며 앞글을 하나씩 곱게 따서 적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맑은 기운을 느끼면서 밝은 손맛을 살려 내 이름을 씩씩하게 적습니다. (4345.8.6.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