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de (Hardcover)
Ralph Gibson / Taschen UK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사진책 《days at sea》는 1974년에 나온 오래된 책이라 뜨지 않습니다. 다른 책에 이 느낌글을 붙여, 랄프 깁슨 님 사진삶을 읽는 도움글로 삼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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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사진은 어디에서나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60] 랄프 깁슨(Ralph Gibson), 《days at sea》(Lustrum press,1974)

 


  아름다움이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미움이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은 내가 밉다고 느끼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에는 무엇을 바라보든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내 마음이 아름다운 사랑으로 가득할 때에는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든 아름다운 사랑이 감도는 눈길이 됩니다. 내가 밉다고 느낄 적에는 무엇을 바라보든 마냥 밉다고 여깁니다. 내 마음이 미운 슬픔으로 꽉 찼을 적에는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든 미움과 슬픔으로 촉촉히 젖은 눈길이 됩니다.


  렘브란트가 그려서 아름다운 그림이 아닙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며 바라보기에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이중섭이 그렸든 박수근이 그렸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가 좋다고 느끼며 바라볼 때에는 좋은 그림입니다. 내가 즐겁다고 느끼며 바라볼 적에는 즐거운 그림입니다.


  내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채 바라보면 어느 그림을 바라보더라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그림입니다. 곧, 내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채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 앞서 나 스스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진만 찍습니다.

 

 


  마음이 있고서야 그림이 있고, 마음이 있은 뒤에야 사진이 있습니다. 그림은 아름다움을 담지 않습니다. 스스로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은 사람이 그림을 그릴 때에 비로소 ‘그림이 아름답게 다시 태어납’니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담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려는 사람 스스로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으며 살아갈 때에 비로소 ‘사진이 아름답게 새롭게 태어납’니다.


  어디에나 있는 아름다움이기에, 여행을 다녀야 아름다움을 담는 사진을 얻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아름다움이기에, 조그마한 시골마을 조그마한 보금자리에서 얼마든지 ‘아름답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날마다 얻을 수 있습니다.


  사진은 어디에서나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곳은 따로 없습니다. 관광지에 보면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는 푯말이 서기도 합니다만, 사진 찍기 좋은 곳은 따로 없어요.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사랑’을 담을 수 있으면 어디에서라도 좋은 사진을 찍습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깨닫지 않을 때에는, ‘뭔가 그럴싸한 모습’이 감도는 곳에서라도 사진 한 장 얻지 못해요.


  랄프 깁슨(Ralph Gibson) 님 사진책 《바다에서 보낸 나날(days at sea)》(Lustrum press,1974)을 읽습니다. 바다에서 보낸 나날을 스스로 아름답고 즐거우며 예쁘게 생각하기에 《days at sea》라는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랄프 깁슨 님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글로 이 느낌을 담아냈을 테고, 흙을 일구는 사람이라면 텃밭 푸성귀나 열매나무 꽃송이로 이 느낌을 담아냈을 테지요.

 

 


  사진이기에 남달리 나타내거나 보여주는 모습은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되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사진으로 나타내거나 보여줄 뿐입니다. 곧, 나는 사진을 바라보면서 삶을 읽거나 사랑을 읽거나 꿈을 읽을 수 있는 한편, 풀 한 포기를 바라보거나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거나 매미 한 마리를 바라보면서 삶을 읽거나 사랑을 읽거나 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사진을 찍습니다. 바다에서도 사진을 찍고 뭍에서도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라도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아가씨 궁둥이를 바라보면서도 사진을 찍고, 코주부 아저씨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으로 이녁 이야기를 가만히 들려줍니다. 문지방을 찍으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책을 손에 쥔 뒷모습을 찍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활짝 웃는 얼굴을 찍어야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습니다. 손가락이나 손바닥을 찍어야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습니다. 알몸과 맨몸은 무엇이 다를까요. 텅 빈 손과 살짝 놓은 손은 어떻게 다를까요. 눈을 뜨고 듣는 이야기와 눈을 감고 듣는 이야기는 무엇이 다를까요. 사랑하는 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때하고 거웃을 만지작거릴 때하고 어떻게 다를까요.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 얼굴을 볼 때하고 잘 닦은 주전자를 들여다보며 내 얼굴을 볼 때하고 무엇이 다를까요. 참빗으로 빗질을 할 때하고 손가락으로 빗질을 할 때하고 어떻게 다를까요.


  빌려서 타는 자전거로도 길을 달립니다. 목돈을 모아 장만한 자전거로도 길을 달립니다. 두 다리로도 길을 달립니다. 버스를 타고도 길을 달립니다. 그예 길을 달립니다.


  가만히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쪼그려앉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해도 달도 별도 구름도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내가 엉거주첨 서서 올려다본들 해가 달라지지 않아요. 내가 실눈을 뜨고 올려다본들 달이 달라지지 않아요. 내가 깨끔발을 뛰며 올려다본들 별이 달라지지 않아요.

 

 


  바람도 냇물도 멧자락도 노상 그대로 있습니다. 사랑도 꿈도 이야기도 한결같이 그대로 있습니다. 바람을 느끼거나 사랑을 생각하는 내 매무새가 달라질 뿐입니다. 냇물을 받아들이거나 꿈을 맞아들이는 내 몸짓이 달라질 뿐입니다. 멧자락을 오르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내 몸가짐이 달라질 뿐입니다.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고 싶다면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됩니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고서야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지 못합니다. 사진길을 걷고 싶다면 기쁘게 삶길을 갈고닦을 노릇입니다. 삶길을 갈고닦지 않고서야 사진길에 씩씩하고 다부지게 서지 못합니다.


  랄프 깁슨 님 사진을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습니다. 랄프 깁슨 님 사진을 보아도 좋고 안 보아도 좋습니다. 내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피어나도록 삶을 보살필 수 있으면 됩니다. 내 눈길이 아름다움을 사랑하도록 하루하루 즐거이 누리면 됩니다. (4345.7.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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