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크레파스 풀빛 동화의 아이들
엘렌느 데스퓨토 그림, 로버트 먼치 글, 박무영 옮김 / 풀빛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내가 맑은 빛을 생각할 때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6] 엘렌느 데스퓨토·로버트 먼치, 《이상한 크레파스》(풀빛,2002)

 


  어질어질한 머리로 밤새 잠을 뒤척이다가 새벽 늦게 잠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이른아침에 식구들은 아직 꿈누리를 날아다니고, 나는 홀로 걸레를 손에 쥐고는 방바닥을 훔칩니다. 끝방 바닥에 깔던 깔개를 들추어 마당에 넙니다. 아침부터 좋은 햇살이 퍼지니, 이 햇살을 받아 보송보송 곱게 마르리라 생각합니다.


  걸레질을 하고 걸레를 빨고, 다시 걸레질을 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합니다. 내 어릴 적 우리 어머니도 이른아침부터 집안을 쓸고 닦았습니다. 하루쯤 걸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어머니는 으레 이른아침부터 집안을 쓸고 닦으며 하루를 열었습니다.


  두 아이와 부산스레 살아가는 하루를 되짚습니다. 아침 낮 저녁으로 비질을 해도 먼지나 모래가 쓸립니다. 집안과 마당을 쉴새없이 드나드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먼지와 모래를 실어나릅니다. 아들 둘 낳아 돌본 우리 어머니라면 날마다 이른아침부터 쓸고 닦는 일부터 할밖에 없었겠다고, 이제 와서 몸으로 깨닫습니다. 이른아침에 걸르지 않으며 할 일이라면, 비질과 걸레질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비질과 걸레질을 마친 나는 물을 마십니다. 어제 잔뜩 짠 풀물도 마십니다. 늦도록 자는 두 아이는 몸이 아프니까 늦도록 잘 텐데, 내 몸이라고 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몸을 일으켜 움직입니다. 아이들 일어나서 배고프다 하면 무엇을 먹일 때에 좋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이 몸이 나아져 신나게 뛰놀 만하다면, 아이들과 모처럼 어떤 나들이를 해 볼까 헤아려 봅니다.

 

 


.. 어느 날 브리짓이 엄마한테 말했어요. “엄마, 저 크레파스 좀 사 주세요. 친구들은 모두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그걸로 얼마나 멋지게 그림을 그리는지 몰라요.” ..  (5쪽)


  좋은 햇살과 함께 아이들 몸이 차츰 좋아지리라 믿습니다. 그래, 그러면 오늘 아이들이 일어나면 맨 먼저 옷을 벗겨야지요. 따순 물 나오도록 보일러를 돌리고, 물이 따뜻해질 때까지 시원한 물로 아버지부터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다음, 이윽고 물이 따뜻해지면 두 아이를 함께 씻겨야지요. 이동안 이불 한 채는 빨래기계에 넣어 빨래하고, 나머지 옷가지는 내가 복복 비비고 살살 헹구어야지요. 다 씻고 다 빨래한 다음, 식구들 모두 풀물을 마시며, 맛난 밥을 차려서 먹든, 아무래도 내 몸이 많이 힘드니 바깥으로 나가서 바깥밥을 사먹든 해야지요.


  생각을 해 보고, 다시 생각을 해 봅니다. 집에서 하는 일을 생각합니다. 집에서 누리는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늘 바라보며 받아들일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 사랑을 생각합니다. 옆지기와 이루는 삶을 생각하고, 시골집에서 맞이하는 하루를 생각합니다.


  봄에 처마 밑으로 찾아든 제비는 새끼 네 마리 씩씩하게 잘 컸습니다. 새벽에 깨고 아침에 날갯짓을 하다가는 저녁 늦도록 아무도 안 돌아옵니다. 모두들 먹이를 찾느라 바쁠는지 모르며, 기운찬 날갯짓을 가다듬느라 멀리멀리 마실을 다녀올는지 몰라요.

 


.. 엄마는 브리짓이 말했던 크레파스를 사 주었어요. 그것도 500개나 말이에요 ..  (6쪽)


  내가 맑은 빛을 생각할 때에 내 넋이 맑게 거듭난다고 느껴요. 내가 벌나비를 바라보며 너희 참 곱구나 하고 생각하거나 말을 건넬 때에, 벌나비는 한결 고운 빛을 뽐내면서 싱그럽게 날갯짓하리라 느껴요. 책 한 권을 읽으면서도 너희 참 아름다운 줄거리를 이 몸에 아로새겼구나 하고 생각하거나 말을 건네면, 책 한 권은 더 싱그러우며 슬기로운 빛무늬를 나누어 준다고 느껴요.


  내가 어두운 빛을 생각한다면, 내 넋 또한 어둡게 바뀌겠지요. 내가 케케묵은 빛을 헤아리면, 내 얼 또한 케케묵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늘 맑은 빛을 생각하며 살아야 즐겁습니다. 이 좋은 삶을 생각하고, 저 좋은 길을 바라보며, 그 좋은 꿈을 북돋울 때에 하루하루 기쁘게 누리리라 느껴요.


  글을 쓰는 자리에서는 좋은 생각을 글로 빚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서는 좋은 생각을 그림으로 담습니다.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는 좋은 생각을 사진으로 아로새깁니다.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는 좋은 생각을 목소리에 싣습니다. 애써 궂은 생각이나 슬픈 생각을 글·그림·사진·노래에 얹을 일이 없어요. 굳이 나쁜 생각이나 몹쓸 생각을 어디에도 드러낼 까닭이 없어요.


  아이들 먹으라고 일부러 썩은 고기를 차릴 어버이란 없어요. 옆지기 먹으라고 일부러 쉰내 나는 나물을 내놓을 짝꿍은 없어요. 그런데 오늘날 삶터를 돌아보면, 더 때깔 좋고 더 굵직하게 보이는 푸성귀나 열매를 만든다면서 농약을 치고 비료와 항생제를 먹여요. 풀한테도 짐승한테도 못할 짓을 자꾸 일삼아요. 가게에 가득한 과자와 소시지와 빵마다 갖가지 화학첨가물 범벅이에요. 이들 먹을거리를 만든 사람은 ‘내 사랑스러운 아이’한테 먹일 생각이었을까요. 공장에서 화학첨가물 만드는 사람은 ‘내 사랑스러운 옆지기’한테 먹일 생각인가요.

 


.. “네, 엄마! 정말 깨끗이 지워지고 있어요!” 브리짓의 그 말은 사실이었어요. 목욕탕에서 나온 브리짓은 진짜 완전히 지워져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나, 세상에!” 엄마는 너무 놀라 소리쳤어요. “큰일이구나, 브리짓!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학교에 갈 수 있겠니?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학교에도 갈 수 없고, 일자리도 절대 구할 수 없단 말이다!” ..  (26쪽)


  엘렌느 데스퓨토 님 그림과 로버트 먼치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이상한 크레파스》(풀빛,2002)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어머니는 ‘아이와 살가이 얘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림책 어머니 또한 고작 열 몇 해 앞서는 ‘똑같은 아이’였을 텐데, 참말 열 몇 해만에 그림책 어머니는 아주 틀에 박히거나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고 말아요. 스스로 생각을 하지 못해요. 스스로 생각을 빛내지 않아요.


  한낱 그림책 줄거리로 나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학교에도 갈 수 없고, 일자리도 절대 구할 수 없단 말이다(26쪽)!” 같은 외침이 아니라고 느껴요. 참말 오늘날 한국땅 수많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런 굴레에 갇혀요. 생각이 아닌 굴레에 갇혀요. 생각을 버리고 굴레를 붙잡아요. 생각을 놓고 굴레를 거머쥐어요.


  왜 아이하고 함께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요. 왜 아이한테 크레파스를 500개씩이나 잔뜩 안기기만 하나요. 크레파스 500개 가운데 하나쯤 어머니가 즐겁게 손에 쥐어 그림을 그리면 안 될까요. 아이 아버지는 집에서 낮잠만 잘 노릇이 아니라, 500개나 되는 크레파스 가운데 하나를 쥐고는 아이랑 신나게 그림놀이를 누릴 수 없을까요.

 


.. 아빠는 전보다 더 멋지게 보였어요.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어때요? 아빠가 더 멋있어 보이지 않나요?” 브리짓이 물었어요. “난 도대체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구나!” “맞아요.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  (30쪽)


  그림책 어린이는 크레파스를 500개 가집니다. 이윽고 다른 500개를 가집니다. 머잖아 새로운 500개를 또 가집니다. 자그마치 1500개나 되는 크레파스를 가집니다. 이동안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 곁에서 아이 삶을 지켜보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느라 이토록 바쁜가 궁금합니다. 무엇에 쫓겨 이렇게 아이가 사랑스레 살아가는 꿈결을 지켜보지 못하는가 궁금합니다.


  ‘화가 되는 길’을 걸어가라고 아이한테 크레파스를 사 주지 않습니다.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길’을 걸어가라고 아이한테 이것저것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모두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길을 손 잡고 걸어갈 노릇입니다. 맑은 빛을 생각하며 서로 맑은 꿈을 나눌 살붙이입니다. 맑은 빛을 아끼며 서로 맑은 사랑을 나눌 좋은 삶동무입니다. (4345.6.21.나무.ㅎㄲㅅㄱ)

 


― 이상한 크레파스 (엘렌느 데스퓨토 그림,로버트 먼치 글,박무영 옮김,풀빛 펴냄,2002.3.20./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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