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특별하게 조금 다르게 함께 살아가기 - 자폐인 형제와 함께 살아온 한 가족의 진솔한 삶의 기록
주디 카라시크 지음, 폴 카라시크 그림, 권경희 옮김 / 양철북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함께 있어 좋은 나날
 [사랑하는 배움책 2] 주디 카라시크·폴 카라시크, 《함께 살아가기》(양철북,2004)

 


- 책이름 : 함께 살아가기
- 글 : 주디 카라시크
- 그림 : 폴 카라시크
- 옮긴이 : 권경희
- 펴낸곳 : 양철북 (2004.8.9.)
- 책값 : 9800원

 


 겨울날 방바닥에 불이 뜨끈뜨끈 올라옵니다. 참 좋습니다. 내 삶에서 글쓰기를 내 일로 삼겠다고 여긴 1995년부터 지난 2011년까지 겨울날 손가락이 차갑게 얼지 않고 글을 쓴 적이 아직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곳 전남 고흥에서 마련한 우리 시골집에 불을 후끈후끈 넣도록 기름값을 많이 버는 삶이란 소리가 아니요, 우리한테 목돈이 넉넉히 있어 햇볕전지판을 지붕에 붙여 따순 물 마음껏 쓴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남녘땅 고흥 시골마을은 날이 참말 폭하니까 방바닥에 불을 조금 넣어도 따스히 겨울을 날 수 있어요.

 

 지난겨울 나던 충청북도 멧골집에서는 다달이 기름 300리터를 빠듯하게 써야 했습니다. 이러고도 물은 얼어붙어 얼음물 빨래를 하느라 날마다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이무렵 첫째 아이는 막 네 살로 접어들며 밤오줌을 가릴 듯 말 듯했으니 아이 기저귀 빨래는 퍽 줄었지만, 겨울철이니 아이 두툼한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넘쳤어요. 지나고 나니 아무렇지 않게 말할 뿐, 한창 얼음물 빨래를 하며 절로 곱아 따가운 손가락을 겨드랑이에 끼며 녹이면서 빨래할 때에는 참말 봄이 언제 오나 하고 노래노래 했어요. 노래로 견디고 봄꽃을 그리는 꿈으로 살았어요.

 

 오늘 내가 퍽 따스한 시골집에서 손가락 얼어붙지 않으며 글을 쓰기에 춥게 겨울살이를 하던 지난날을 잊을 수 있지 않습니다. 돌이키면, 나는 추위를 덜 타지만, 옆지기는 추위를 많이 탑니다. 그동안 집식구한테 너무 모진 삶을 보내도록 했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따스한 날씨가 이렇게 좋다면, 따스한 손길로 따스히 나누는 사랑은 참말 얼마나 좋으며 기쁘고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 모진 미움이나 차디찬 매몰참이나 쓰라린 생채기는 사람들한테 얼마나 슬프며 고단한 삶이 될까요.


.. 이날 큰오빠 데이비드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집 지붕 위에 올라갔다. 큰오빠가 이 집에서 산 지 거의 40년이 되도록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평생을 자폐증에 허우적거렸던 오빠에게 그 흔한 경험을 맛보며 줄 생각을 더 일찍 못했던 것이다 … 불현듯 만약 늘 자기가 집안에 걱정을 안겨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10, 98쪽)


 함께 있어 좋은 나날입니다. 좋은 사람하고 있으니 좋은 삶이요 좋은 나날이라 할 테지만, 좋고 아니고를 떠나 함께 있어 좋은 나날이에요.

 

 나는 우리 아이들이랑 옆지기하고 한집에서 살아가며 이들 (나를 뺀) 세 식구가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느 모습은 좋고 어느 모습은 나쁘다고 금을 그을 수 없어요. 어느 모로 보든, 어느 모습을 느끼든, 한결같이 내 살붙이요 내 사람이며 내 빛덩어리예요. 밥을 먹고 똥을 누는 사람이고, 잠을 자고 눈을 뜨는 사람이에요. 춤을 추고 노래하는 아이들이며, 까르르 웃다가 엉엉 우는 아이들이에요.

 

 오직 함께 있어 좋은 나날입니다. 비싼 밥을 먹을 수 있대서 좋지 않아요. 푸성귀를 잔뜩 벌여 먹는대서 나쁘지 않아요. 값싸게 장만해서 밥을 먹으니 좋을까요.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가 제사를 하신 다음 남은 떡을 손수 가져다주셔서 고마이 먹으니 좋을까요.

 

 오물오물 냠냠 제사떡을 씹어먹습니다.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우리가 드릴 만한 무언가 있을까 떠올리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지어 스스로 일구는 삶인 어르신인데, 우리가 드릴 만한 무언가는 따로 없습니다. 그래, 이와 같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주셔요. 다 받을게요.’ 하는 한 가지를 드릴 수 있을까요. 딸아들 모두 도시로 나간 이웃 어르신들 댁에 틈틈이 마실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될까요. 무엇보다 우리 네 식구 스스로 우리 삶을 우리 손과 몸뚱이 놀려 짓는 길을 걷는다면, 시나브로 예쁜 선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흐뭇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 큰오빠의 목욕 가운 밑에 가려져 있던 상자를 찾아 내가 빌렸던 책 두 권을 팽개치듯 던져 넣는 순간 갑자기 큰오빠가 한 번도 자기 방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랬다. 나는 물건들을 치우느라 반나절 동안 놀지도 못하고 고생 고생 하는데, 왜 이래야 하지? 그런데 큰오빠의 물건은 언제나 큰오빠가 원하는 장소에 그대로 있었다 ..  (37쪽)


 아이들은 더 예쁘장하게 생겼다 해서 예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더 일찍 말문을 튼대서 더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더 빨리 글을 깨치고 책을 읽는대서 더 똑똑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다울 때에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똑똑하고 좋아요.

 

 아이들은 천재도 영재도 아닌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내 아이가 아닌 아이입니다. 이 아이들은 나와 같은 목숨이고 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 스스로 눈빛 맑은 삶일 때에, 아이들은 아주 마땅히 천천히 저희들 눈빛 맑은 삶을 사랑하면서 씩씩하게 저희 길을 걷습니다.

 

 아이들을 학원에 넣을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삶을 배워서 아이하고 함께 눈 손 마음 몸 꿈 사랑을 맞추면서 펼치면 됩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가 배움터가 되도록 슬기로이 일구면 됩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이 터가, 이 집이, 이 마을이, 이 흙땅이, 이 숲이, 이 멧자락이, 이 냇물이, 이 바람 쐬는 후박나무 마당가 빨래줄이 배움터예요.

 

 배움터는 저 멀디먼 읍내나 면내나 도회지에 있지 않아요. 배움터는 저 머나먼 일본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나 독일이나 호주나 캐나다에 있지 않아요. 내 보금자리가 배움터예요. 내 마을이 배움터예요. 내 가슴에서 피어나는 배움꽃이에요.


.. 나는 이 상황이, 비록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지만,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임을 알고는 있었다. 큰오빠에게 내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 것처럼, 내게 큰오빠도 한 핏줄인 가족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연하고도 옳은 일,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걸 그 당시에는 원치 않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달아나고 싶었던 것이다 …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오빠는 자폐증이 없는 사람들이 자폐인들을 보는 시각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이 영웅이 아니라 자폐증이 없는 사람들이 영웅인 영화를 오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누구라도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자폐증이 있는 형인 걸 알 수 있다 ..  (101, 184쪽)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구나 스스로 깨달아요. 장애인이라 하든 비장애인이라 하든, 어느 시설이나 학교나 학원에 보내야 비로소 무언가를 배우면서 이 땅에서 튼튼하거나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아요. 사람들이 도시로 너무 많이 몰리는 나머지, 도시에서 돈버는 일자리에 쫓기듯 휘둘리는 나머지, 그만 학교라고 하는 울타리를 세울밖에 없고, 장애인 시설이나 복지 시설을 마련할밖에 없어요.

 

 가만히 헤아려 보면 누구나 쉽게 알아채요. 동양이든 서양이든 어디이든, 그리 멀지 않은 예전에는 누구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누구나 집에서 어버이와 둘레 어른한테서 배웠어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가리지 않아요. 누구보다 내 집 어른들이 당신들 목숨을 나눈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아끼고 믿을 때에 배움씨앗이 배움꽃으로 피어나요. 배움열매가 맺고 새로운 배움나무가 흙땅으로 떨어져 자라자면, 우리들 살아가는 마을살이가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해요.

 

 마을이 학교라 하는데, 마을에 앞서 집이 학교예요. 작디작은 보금자리 집 한 채가 배움터예요. 작은 배움터가 서로 모이고 서로 얼크러지면서 예쁜 배움마을이 돼요. 배움집 하나가 모여 배움마을이 되고, 배움마을이 나란히 어깨동무하면서 배움나라가 됩니다. 배움나라가 하나둘 엮이면 배움별, 곧 이 지구별이 온통 배움빛으로 가득하겠지요.


.. (장애인 보호시설) 브룩 팜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서, 오빠는 정기적으로 집을 방문했다. 집에서는 오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빠는 마음껏 쉬었으며, 그가 좋아하는 쇼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집에서 오빠는 일을 통해서나 카운슬러의 지도를 받아 개선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저 부모님과 동생들과 함께 집에서 사는 가족이었다 ..  (175쪽)


 주디 카라시크 님이 글을 쓰고, 폴 카라시크 님이 그림을 넣은 《함께 살아가기》(양철북,2004)를 읽습니다. 두 카라시크 남매는 당신 식구들 이야기를 책 하나로 함께 빚습니다. 두 남매가 쓴 두 남매 식구 가운데 한 사람은 장애인이라고 해요.

 

 장애인, 그래요, 장애인이라고 해요.

 

 이야기책 《함께 살아가기》 첫머리부터 거의 끝자락까지 ‘장애인과 살아가기’를 이야기해요. 어느덧 마무리가 될 무렵, 두 사람 카라시크 남매를 비롯해 모든 식구들은 이제껏 함께 살았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한 사람이 ‘장애인’이 아닌 ‘그저 나와 같은 한식구’요, 나와 같으면서 다른 목숨인 어여쁜 사람이라고 깨달아요.


.. 파란 불이 들어오자, 우리는 앞으로 나간다. 차 안은 조용하다. 폴과 나와 큰오빠, 말은 소리 없이 우리의 뇌 안에서 폭포처럼 떨어지고 있다 ..  (232쪽)


 《함께 살아가기》를 읽는 동안에도, 《함께 살아가기》를 덮은 뒤로도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쓴 두 사람뿐 아니라 다른 집에서도 서로 엇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모두들 제도권학교에 발을 디뎌 ‘현대 교육’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쉽게 ‘장애인’이라고 배워요. 이 낱말을 쓸밖에 없습니다.

 

 내 어릴 적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왜 한국말에는 ‘장애인’을 가름할 만한 낱말이 없을까?’ 하고 몹시 궁금했어요. ‘병신’은 한국말이 아니에요. 한자말이에요. 장애인도 한자말이에요.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바꾼 말이고, 장애인을 다시 장애우로 바꾸자고 하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다 한자말 굴레에서 맴돌 뿐이에요. 이런 낱말을 바꾼대서 복지나 문화나 생각이 달라지지 않아요. 무엇보다 말바꾸기는 삶짓기하고 너무 동떨어져요. 삶을 아름다이 사랑할 길을 찾아야지, 껍데기 말만 갈아치운대서 나아질 수 없어요.

 

 귀머거리 절름발이 장님 외다리 외팔 애꾸 얼금뱅이 …… 온갖 말마디는 있는데, 이 모두를 아우르는 한국말은 딱히 없습니다. 왜 없을까, 왜 한국말에는 이런 말이 없을까,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장애인’을 가리키는 한국말 없는 일이란 참 좋은 일 아닌가 하고.

 

 왜냐하면, 굳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를 까닭이 없으니까요.


.. “엄마와 아빠는 네 큰형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큰형 다음엔 다른 자식은 절대로 안 낳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폴, 엄마와 아빠는 자식을 넷 낳기로 했고, 또 실제로 네 명을 낳았지.” ..  (149쪽)


 왼손을 쓰니 왼손잡이입니다. 오른손을 쓰니 오른손잡이입니다. 몇몇 사람은 바른손이라고도 쓰지만 바른손잡이라고는 쓰지 않습니다.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니 장님입니다. 귀로 듣지 못하니 귀머거리입니다. 다리를 저니 절름발이입니다. 팔이 하나, 곧 외로 팔 하나 있으니 외팔입니다. 얼굴이 얽어 얼금뱅이입니다.

 

 장님도 귀머거리도 절름발이도 외팔도 얼금뱅이도 누가 누구를 따로 놀리는 말이 아닙니다. 바보도 멍청이도, 곰곰이 따지면 누가 누구를 놀리는 말이 아닙니다. 저절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돌을 가리켜 돌이라 합니다. 똥을 가리켜 똥이라 합니다. 금을 긋거나 사이를 나누는 말이 아니에요. 바라보며 느끼는 그대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닭은 닭이고 개는 개요 고양이는 고양이예요. 개를 고양이라 가리켜야 높아지지 않아요. 말을 소라고 가리켜야 훌륭해지지 않아요.

 

 나는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애늙은이가 되면 안 됩니다. 할머니는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보고 젊다느니 어리다느니 말할 수 없어요. 할머니는 할머니예요.

 

 다리 하나를 쓰지 못하면 두 다리 쓰는 사람하고 같을 수 없어요. 두 다리 쓰는 사람은 외다리로 살아가는 사람 마음을 알 수 없어요. 거꾸로, 외다리는 두다리 삶을 모르겠지요. 그러나, 두 사람은 두 사람대로 서로 좋은 삶을 일구어요.

 

 기운센 사람은 일을 더 많이 하겠지요. 기운이 여리면 여린 대로 일을 하며 살림을 꾸리겠지요. 기운이 세어 일을 많이 한대서 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기운이 세기 때문에 짐을 더 나를 수 있고, 기운 여린 사람을 등에 업고 함께 길을 나설 수 있어요.

 

 사람 삶에는 ‘정상’이나 ‘비정상’이 없어요. ‘장애’도 ‘비장애’도 없어요. 모두 다 달리 선물받은 삶이에요. 오롯이 사람으로 바라볼 나날이에요. 뻐드렁니는 뻐드렁니이고 토끼이는 토끼이예요. 덧니는 덧니일 테고 주걱턱은 주걱턱이에요. 모두들 함께 있어 좋은 동무요 좋은 이웃이고 좋은 사람이에요. 더 예쁘거나 덜 예쁜 틀이 없어요. 더 나쁘거나 덜 나쁜 금이 없어요.


.. 오빠에게는 우리가 그 여행에서 함께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빠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함께 있음’은 정말 중요한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빠에게 우리는 미래에도 같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 가족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  (186쪽)


 함께 걸어가면 돼요. 함께 쉬면 돼요. 함께 놀면 돼요. 함께 밥먹으면 돼요. 함께 잠자리에 들고, 함께 활짝 웃으면 돼요.

 

 얼굴이 검으니까 깜둥이예요. 얼굴이 하야니까 흰둥이예요. 나는 누렁둥이일 뿐이고, 나는 내 살결이 누렁둥이라서 이 모습이 좋아요. 크레파스에 살빛이라는 말을 쓰는 일이 잘못이지 살빛이라는 낱말을 쓰는 일이 잘못일 수 없어요. 아프리카땅 아주 더운 나라에는 눈이 없어요. 눈이 없는 곳에서는 눈이 없으니 눈이라는 낱말조차 있을 턱이 없어요. 우리한테는 함박눈 싸락눈 흰눈이 있어요. 눈송이 눈꽃송이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 살빛을 쓰면 아름다운데, 크레파스 공장에서 엉뚱한 빛깔을 살빛으로 넣는 바람에 우리는 우리 살빛을 잊었어요. 한겨레 살빛은 흙빛을 닮은 살결 빛깔이었거든요. 이러한 빛깔을 우리 스스로 잊거나 잃었어요. 구리빛도 누런빛도 아닌 흙빛이 여느 한겨레 살빛이었어요.

 

 사람들 살빛뿐 아니라 잎빛을 보거나 줄기빛을 보아도 서로 매한가지예요. 잎이라 해서 ‘다 똑같은 푸른잎’이 아니거든요. 참나무 푸른잎 빛깔이랑 소나무 푸른잎 빛깔이 같을까요. 살구나무랑 매화나무 푸른잎이 같은 푸름일까요. 은행나무랑 벚나무 줄기는 똑같은 빛깔일까요. 도토리랑 밤이랑 똑같은 빛깔일까요. 개나리랑 원추리랑 수선화랑 달맞이랑 똑같은 노랑일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저 노랑이나 푸름이니 빨강이니 파랑이니 하면서 뭉뚱그려요.

 

 함께 있어 좋은 사랑이라고 느끼면 기쁘겠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고마운 사랑인 줄 느끼면 반갑겠어요.

 

 아,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글을 쓰던 나는 이제 졸음이 쏟아져요. 세 식구 새근새근 자는 옆방으로 살금살금 발소리 죽이며 건너가서 다시 이불 뒤집어쓰고 눈을 붙여야겠어요. 네 식구 나란히 누워 하얗게 동 트는 새 아침 예쁘게 맞이해야겠어요. 이불 뒤집어쓰고 따순 기운 듬뿍 받고 싶어요. (4345.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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