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받는 책읽기 (김정일)

 


 재벌회사는 으레 아들이나 딸한테 회사와 돈과 주식과 이것저것 골고루 빈틈없이 물려줍니다. 구멍가게는 으레 딸이나 아들한테 가게를 물려줍니다. 시골 흙일꾼은 으레 아들이나 딸한테 논이랑 밭이랑 집이랑 몽땅 물려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느 어버이는 제금 나려는 아이들한테 으레 전세 얻을 돈을 물려주거나 아파트를 한 채 사 주거나 냉장고나 빨래기계나 자가용이나 무어든 한두 가지나 몇 가지를 새로 장만해 줍니다.

 

 모든 푸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남깁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믿음은 믿음을 낳습니다. 꿈은 꿈을 낳으며,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습니다.

 

 옛 시골 초등학교 건물 여러 칸에 온갖 책을 빽빽하게 모시는 나는 우리 아이한테 책을 물려줄까요. 책을 읽는 삶을 물려줄까요. 책을 읽으며 빚는 착한 마음결을 물려줄까요. 책으로 담는 아름다운 삶을 물려줄까요. 책으로 적바림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물려줄까요.

 

 북녘땅 사회와 정치를 이끄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북녘땅 사회와 정치를 이끌던 사람은 ‘정치권력 물려받기(세습)’를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죽은 사람을 헤아립니다. 누구이든 죽음은 슬픕니다. 죽음 앞에서는 웃을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이란 끝이 아닌 이어짐입니다. 누구 한 사람 죽었다 해서 모든 이야기가 묻히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둘레로 살그마니 이어집니다. 한 사람 죽음이 다른 사람한테 어떠한 넋으로 이어질까를 헤아릴 때에 반가울 수 있고 안쓰러울 수 있습니다.

 

 슬픔이 기쁨을 낳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곱게 죽을 때에는 고운 목숨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어여삐 죽을 때에는 어여쁜 꿈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우람한 빗돌을 어마어마하게 세우는 죽음일 때에 슬픕니다. 무거운 빗돌을 보드라운 흙에 단단히 박는 죽음일 때에 안쓰럽습니다. 지렁이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고, 씀바귀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며, 해오라기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 또한 흙에서 태어나기에 흙으로 돌아가면서 맑은 넋을 내 아이들과 동무들한테 물려준다면, 싱그러운 빛이 되어 언제라도 다시 태어나며 웃을 수 있어요.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돈이나 집이나 지식을 물려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과 믿음과 꿈을 물려받고 싶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한테 책과 사진과 일거리를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나 또한 내 아이들한테 사랑과 믿음과 꿈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씩씩하게 살아가며 저희 아이들을 낳을 때에도, 우리 아이들이 저희 아이들한테 정갈한 사랑과 따스한 믿음과 너그러운 꿈을 물려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나라에서 좋은 보금자리를 일구며 좋은 마을살이를 누리고 싶어요. 나부터 좋은 이야기를 오순도순 나누고 싶습니다. (4344.12.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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